문재인 정부가 임기 내 비정규직 제로화(0) 공약 실현에 속도를 내면서 민간과 노동계 양측에서 모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기업들은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과 경쟁력 상실을 지적하고 있고, 노조는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하더라도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며 제대로 된 정규직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영배 한국경영자총협회 상임부회장은 25일 경총포럼에서 “모든 근로자가 더 나은 일자리를 원한다고 해서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으로 옮기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주력 사업이 아닌 업무라면 전문인력과 노하우가 있는 아웃소싱을 활용하는 게 효율적”이라며 “글로벌 기업들도 핵심 역량을 중심으로 경쟁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영배 부회장은 최근 민간에서 정규직 전환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는 것과 관련해 “서울대 비학생 조교를 시작으로 간호조무사, 집배원, 학교급식 보조원 등 이들은 비정규직이 아니라 엄연한 협력업체의 정규직이라며 현재의 논란은 정규직, 비정규직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대·중소기업 간 문제로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비정규직 문제는 정규직 과보호도 한 원인”이라며 “연공서열식 임금 체계, 경직된 고용 구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과도한 임금 격차가 지금 우리 노동시장 문제의 본질”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비정규직이 많으면 나쁘고 정규직화를 많이 하면 좋다는 이분법으로 접근하면 갈등만 부추기고 사회 전체 일자리를 감소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노동계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더라도 인천공항공사처럼 차별이 있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인천공항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현장방문을 통해 임기 내 비정규직 제로화 시대를 열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곳이다.
인천공항도 이에 부응해 연내 1만 명에 달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생겼다.
공사는 폭발물처리반 협력업체 직원 14명부터 전환을 시작했는데 공항에서 길게는 15년간 이 분야에서 일을 했지만 고용승계는 물론, 가산점도 없이 다시 채용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또 합격한다 해도 부여되는 직위는 ‘S6급’이다. S등급은 고졸 신입 4~5년차 직위에 해당한다. 10년차 직원이 기존에는 4000만 원 정도 받았다면 S6급은 2800만 원에 불과해 연봉이 오히려 깎이게 돼 논란이 됐다.
공항 측은 2800만 원은 기본급으로 성과급과 직무수당, 기여금 등을 더하면 현재의 연봉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명했지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가 또 다른 차별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공공비정규직노동조합(이하 공공비정규직노조)은 22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공부문 정규직화, 당사자 의견을 반영하라”고 요구했다.
공공비정규직노조는 “진정한 정규직화는 무기계약 노동자의 근로조건이 개선되는 것”이라며 “무기계약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사이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또 일자리위원회에 ‘공공부문 정규직화 공동추진 협의기구’ 구성을 제의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가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의 의견을 구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다.
이처럼 노사 양측 모두 밀어붙이기식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지만 정부 측은 속도를 내고 있다.
이용섭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은 25일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비정규직을 과도하게 가지는 기업들에 대해 일정한 상한을 둬서 상한을 초과하면 부담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상시 근무나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일자리는 비정규직 채용을 금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6월 기준 고용형태별 근로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의 시간당 임금총액은 1만2076원으로, 정규직 1만8212원의 66.3%에 불과했다. 2015년 65.5%보다 정규직과의 격차가 0.8%포인트 줄어들기는 했지만 사실상 정체된 상태다.
전문가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새 정부가 방향은 잘 잡았지만 기업들과 노조의 의견을 적극 듣고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 국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새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화 시대 공약이 방향은 맞게 잡았다”며 “앞으로 정규직과 정규직이 된 비정규직 간의 차별을 없애고 기업의 경쟁력도 키울 수 있게 정책을 잘 꾸려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