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주요 공항과 승객들을 큰 혼란에 빠트린 영국 대형항공사 브리티시항공(BA)의 정보·기술(IT) 시스템 고장은 무리하게 비용을 절감하려던 데서 빚어졌다. 비용을 줄이고자 IT 관련 업무를 인도 아웃소싱 업체에 외주를 줬다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BA는 지난 27일(현지시간) IT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 영국의 관문인 히스로공항과 개트윅공항에서 출발하는 대부분의 항공편을 취소·지연시킨다고 밝혔다. 5월 마지막 주 월요일인 29일은 영국의 휴무일인 뱅크홀리데이. 연휴를 맞아 여행을 가려했던 수만 명의 승객이 피해를 입었다.
BA의 알렉스 크루즈 최고경영자(CEO)는 사태가 일어난 지 사흘 만인 29일에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70개국, 170개 공항에서 7만5000명 승객에게 큰 혼란을 준 것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크루즈 CEO는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된 ‘무리한 아웃소싱’을 부정해 성난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이번 IT 시스템 고장이 인도 아웃소싱으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크루즈 CEO는 “적정 시점에 전력 공급과 백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하드웨어가 변경되면서 몇 시간 만에 복구가 됐다”고 밝혔다.
크루즈 CEO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BA 측이 비용 절감을 위해 IT 시스템을 인도 아웃소싱업체에 무리하게 외주를 주면서 이번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용 절감 문제는 BA의 모기업인 국제항공그룹(IAG)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IAG의 윌리 월시 CEO는 아일랜드 항공사인 에어링구스에서 CEO로 재직할 당시 2000명을 감원해 성과를 낸 인물이다. 그는 2005~2011년 BA의 CEO로도 근무하며 관리자급을 감원해 노조의 반발을 샀다. 항공전문가인 존 스트릭랜드는 “월시 CEO의 강점은 비용 관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 4년간 IAG의 주가가 120% 이상 상승했는데 이는 비용 절감이 성과로 연결된 것이라고 스트릭랜드는 분석했다. 익명을 요구한 애널리스트는 “월시 CEO는 아주 적극적으로 사업을 이끌고 있다”며 “BA의 정책, 전략은 월시 CEO가 단호하게 확립한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최대 노조 단체인 GMB는 “BA가 작년에 회사에 헌신하고 있는 직원들을 감원하면서 IT 부분을 인도에 대거 아웃소싱했다”고 주장했다. 영국 내 직원 700여 명을 감원하고 그 자리를 인도의 타타컨설턴티서비스에 외주했다는 주장이다. BBC의 로리 셀란-존스 기술 담당 기자는 “단순한 전력 문제가 어떻게 그렇게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크루즈 CEO는 이번 혼란으로 자신이 사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동시에 직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에 IT 시스템 문제를 대외적으로 언급하지 말라고 밝혀 사태를 악화시켰다. 익명을 요구한 BA의 한 승무원은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며 “CEO의 메일은 직원들에게 더 분노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대규모 인원 감축이 마땅치 않았던 노조는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 규명을 단단히 벼르고 있다. 노조 GMB의 믹 릭스 대표는 BA의 크루즈 CEO가 설명한 내용을 반박했다. 릭스 대표는 “백업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고 했는데, 근본적으로는 회사에서 핵심 인재가 빠져나갔기 때문에 이번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BA는 29일 비행 스케줄의 95% 이상을 정상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일로 BA가 약 1억 파운드(약 1437억 원)가 넘는 막대한 보상을 해야 할 것으로 전망했다. BA는 항공기 지연·취소로 승객들이 낸 호텔 숙박비, 교통비, 식비 등을 모두 물어줘야 한다. 승객 2인 기준으로 200파운드 호텔, 1인당 호텔-공항을 오가는 교통편 50파운드, 식대는 1인당 25파운드까지 청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