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 갔다. 사회가 주례를 소개하는데 “현재 ○○의 대표이사를 역임하고 계십니다”라고 한다. 역임의 정확한 뜻을 모르는 채 ‘뭔가 중요한 자리를 맡고 있는 사람을 소개할 때 쓰는 말’일 것이라는 짐작으로 ‘역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한글 전용을 강력하게 주장한 최현배가 “말은 동전의 액면처럼 현시적, 평판적으로, 즉 사회에서 사람들이 A라는 뜻으로 사용할 성싶으면 나도 그냥 A라는 뜻으로 사용하면 그만이지, 굳이 그 어원이나 본래의 뜻을 따질 필요가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정말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래의 바른 뜻을 찾아 쓸 필요가 없는 것일까? 결코 아니다. 말은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 약속이 불분명하여 자의적으로 사용하면 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꿔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모든 오해와 분란은 말로 인하여 생긴다. 어원을 무시한 채 ‘현시적’, ‘평판적’으로만 사용하면 되겠는가!
역임은 ‘歷任’이라고 쓰며 각 글자는 ‘지낼 역(력)’, ‘맡을 임’이라고 훈독한다. 따라서 ‘역임’은 ‘지나간 맡은 일’, 즉 과거에 맡았던 일을 일컫는 말이다. “○○○님께서는 ○○○. ○○○ 등을 두루 역임하셨고, 지금은 ○○로(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라고 해야지 “현재 ○○○를(을) 역임하고 계십니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혹자는 ‘力任’이라고 쓰고 ‘힘써 맡고 있다’고 풀이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말이 전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아직 국어사전에 ‘역임(力任)’이라는 단어는 올라와 있지 않다. 지금까지 사회적 약속으로서의 ‘역임’은 ‘歷任’만 있을 뿐이다.
‘歷任’을 잘못 사용하여 ‘현재 ○○를(을) 역임하고 있다’고 해놓고서는 ‘力任’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오용을 합리화하려 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