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광고로 보는 경제] "실수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피임약 광고의 전체주의

입력 2019-04-25 09:46 수정 2019-04-2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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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한 피임약 광고.
▲1987년의 한 피임약 광고.

“실수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1987년 결혼 전문 잡지의 한 피임약 광고.

광고 속 모델 분이 당시 1살이라고 치면, 지금쯤 기자랑 비슷한 나이인 32세 쯤 되셨겠다.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이 광고를 찍었던 걸 기억하고 계실까?


◇80년대 피임 기구의 세일즈 포인트

일단 실수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문구가 눈에 띈다. 광고 속 사진의 모델분이 실수로 태어나시진 않았을 것 같긴 한데....아니, 사람이 좀 실수로 태어날 수도 있지 않나? 하물며 역사에 남은 위인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기자는 벌써부터 조금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세계 인구가 50억을 넘었다. 그러니 피임약을 사용해서 출산을 자제합시다. (???)
▲세계 인구가 50억을 넘었다. 그러니 피임약을 사용해서 출산을 자제합시다. (???)

더 눈에 띈 문구는 ‘세계 인구 50억!’이다. 세계 인구는 1975년에 40억 명, 1987년에 50억 명, 1999년에 60억 명, 2011년에 70억 명, 그리고 재작년인 2017년을 기준으로 75억 명을 돌파했다. 광고는 1987년의 작품이니 이 때 세계 인구가 50억 명을 돌파하긴 했다.

근데, 2019년을 살아가는 기자가 보기에는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가 몹시 의문이다.

사실 세계 인구가 50억 명이 아니라 500억 명을 넘어섰다고 한들, 그게 한 개인과 가정이 피임을 결정해야 할 이유는 아니지 않을까? 극단적으로 가정해 세계 인구가 5명이 되는 바람에 인류가 보전되기 위해서 ‘아기를 더 낳아야한다’면 모를까. 세계 인구가 많다고 피임약을 많이 쓰라는 건 대체 어떻게 성립하는 논리인지 모르겠다.

이 논리는 원래 우리나라 인구를 좀 줄이자는 거다. 세계 인구 50억 명은 ‘50억’이라는 숫자가 주는 임팩트 때문에 인용한 것일 게다. 실제로는 대한민국의 인구가 너무 많으니 이 피임약을 많이 이용해 좀 줄이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출산 자제를 장려하는 국가적 정책기조.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기업들과 민간 단체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출산 자제를 장려하는 국가적 정책기조. 여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기업들과 민간 단체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왠 비약이냐고? 잘 살펴보시라. 광고 오른쪽 상단에는 ‘축복 속에 자녀 하나 사랑으로 튼튼하게’라는 표어가 있다. 자녀를 하나만 낳으시는 게 더 사랑하는 방법이라며, ‘1자녀 가정’에 일종의 규범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왼쪽 상단에는 이 피임약이 ‘대한가족계획협회 의사분과위원회공인피임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대한가족계획협회. 비록 공공기관은 아닌 사단법인이지만, 인구조절에 이바지하는 한 단체가 이런 이런 피임약을 쓰셔서 아이를 좀 덜 낳으시라고 권장하는 역할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대한민국의 모습이었다.


◇요즘 같으면...

이건 전체주의다.

스스로 부양할 능력만 있다면 야구팀 만큼 낳든, 축구팀 만큼 낳든 그건 개인의 자유 아닐까?

아무리 100억대, 1000억대 자산가라도 본인이 의사가 없다면 아이를 안 낳아도 되는 것 아닐까?

‘우리나라 인구가 너무 많으니, 되도록 애들 낳지 마세요’가 정책이었던 시절이고, 또 그런 맥락의 문구가 피임약 광고에까지 실린다. 높은 수준의 1인당 GDP를 달성하기 위해, 훗날 통일할 때의 국가의 인구 부양능력을 위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추구한다는 국가가 각 가정이 되도록 출산을 자제하시길 권고하고 있었다.

정부는 저출산 가정에 혜택을 부여하고, 기업들은 앞장서 정부의 인구정책에 열렬히 호응했다. 하지만, 안일한 전체주의의 대가는 참혹했다.

잠시 언급한 대한가족계획협회. 2006년에 인구보건복지협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가족 계획을 공권력이나 특정 단체가 통제한다는 게 매우 고루한 발상이라, 이름을 잘 바꾼 것 같다. 이름이 바뀐 건, 이 단체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 보시는 단체의 목표는 옛날엔 산아제한정책을 지원하는데 목표를 두었던 단체다. (출처=인구보건복지협회 홈페이지)
▲지금 보시는 단체의 목표는 옛날엔 산아제한정책을 지원하는데 목표를 두었던 단체다. (출처=인구보건복지협회 홈페이지)

1961년에 창립된 이 단체는, 1971년 그 유명한 ‘딸아들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 캠페인에 기여했다고 한다. 1983년에는 ‘인구폭발방지 범국민결의대회 서명캠페인’을 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며 이 단체의 활동 기조는 정반대로 바뀐다. 2004년엔 저출산 대응 홍보사업을 실시, 2015년엔 저출산 인식 설문조사 실시, 2016년엔 저출산 극복 청춘 아이디어 공모전....

1964년엔 정관절제수술 이동시술반을 운영하던 단체가, 2008년엔 전경련과 함께 불임부부 지원사업을 실시하게 됐다. 지나친 산아제한 정책 기조로 국가 존폐를 위협하는 수준의 인구절벽을 맞닥뜨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2020년대를 바라보는 요즘의 피임약 광고는 어떨까. 이제 피임약 광고에서 인구가 몇십 억이니, 몇만 낳아 기르자느니 이런 얘기가 나오면 큰일이 날 것이다. 일개 제약업체가(설령 그게 국가라 할 지라도) 한 가정의 출산과 육아에 대해 이러라느니 저러라느니 하게 되면, 큰일이 나는 게 당연히 맞는 거다. 특히나 ‘덜 낳자’를 권장하는 건 인구절벽을 조장하는 회사라고 지탄받을 가능성도 대단히 높다.

▲여성의 주체적인 피임 의사 결정을 강조하는 광고 카피들. 그보다 당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하나인 걸스데이의 유라가 피임약 광고를 하고 있다는 데서 달라진 인식이 더욱 확실히 느껴진다. (출처=마이보라 CF 캡처)
▲여성의 주체적인 피임 의사 결정을 강조하는 광고 카피들. 그보다 당대 최고의 아이돌 중 하나인 걸스데이의 유라가 피임약 광고를 하고 있다는 데서 달라진 인식이 더욱 확실히 느껴진다. (출처=마이보라 CF 캡처)

요즘의 경구 피임약은 여성의 주체적 의사 결정을 강조하는 편이다.

왜 1987년 피임약 광고에는 ‘아기’가 등장했을까? 이 광고 말고도 많은 피임약 광고가 아기가 나오거나 모델이 없었다. ‘여성모델이 피임약 광고 같은 거 찍는 건 망측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당대 최고라 손꼽히는 여자 아이돌이 나와 피임약 광고 모델을 한다. “난 내가 선택해!”, “그 사람과 어떤 사랑을 할지”. 피임약 복용에 관한 주체적인 여성 본인의 의사 결정을 의미하는 이 문구들!

성관계는 인류와 국가의 인구 조절에 이바지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자유주의적 인식. 여성의 피임약 복용은 남성의 편의를 맞춰주기 위함이 아니라, 내 행복을 위해 선택한 일이라는 주체적 인식. 맞다. 이게 정답이다.

2020년을 바라보는 현재. 정부부처나 기업에서 성인지감수성이 떨어진 채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바로 아래와 같은 대참사가 벌어진다.

▲지난 2016년 행정자치부에서 발표했던 대한민국 출산지도. 지역별 가임기 여성을 집계했다가 국가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서 인식한다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결국 삭제했다.
▲지난 2016년 행정자치부에서 발표했던 대한민국 출산지도. 지역별 가임기 여성을 집계했다가 국가가 여성을 출산의 도구로서 인식한다는 여론의 십자포화를 맞고 결국 삭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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