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혁신의 시대'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유례없이 큰 파도 앞에서 기업들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위세를 떨치는 글로벌 기업도 상황은 마찬가지. 산업 생태계 자체가 뒤바뀌는 상황에서 환골탈태 수준의 혁신과 변화 없이 살아남을 기업은 없다.
이 혼란 통 속 혁신을 바라보는 정반대의 관점이 공존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기업들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혁신의 싹이 피어오를 수 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규제를 강화해 대기업보다는 중소ㆍ벤처기업들이 도전을 마음껏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혁신을 위한 핵심요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투데이는 최근 서울 여의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관 3층에서 유정주 한국경제연구원 기업혁신팀장을 만나 혁신과 규제의 관계에 관해 물었다. 유 팀장이 속한 한경연은 재계 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단체다. 그러나 유 팀장은 정부정책 방향에 대해 일방향이 아닌 합리적,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규제가 혁신 가로막아…룰 필요하지만 치우쳐선 안 돼” = "규제죠."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묻자 유 팀장은 곧바로 '규제'라고 즉답했다.
유 팀장은 이재웅 쏘카 대표가 최근 타다에 대한 ‘불법 영업’ 혐의로 기소된 것을 화두로 꺼냈다.
그는 “최근 들어 기업가 정신을 저해하는 각종 규제가 늘어나면서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라며 “이재웅 대표가 기소된 것처럼 각종 사업을 새로 시작할 때 진입규제가 엄청 높은 것이 한국의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결론은 과감한 규제 개혁이었다.
유 팀장은 “국제 연구 결과에서도 나오듯 한국의 국가경쟁력은 상위권이지만 규제는 최하위권”이라며 “근본적이고 과감한 규제 개혁이 없이는 혁신이 일어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혁신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원인으로 한국의 상대적으로 작은 시장 규모를 꼽았다.
그는 “시장 규모가 작다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다”며 “혁신이 일어나려면 인구도 많고, 땅덩어리도 넓어야 한다. 그래야 규모의 경제가 생기는 법”이라고 밝혔다.
이에 ‘규제 완화’와 ‘기업의 해외 진출’은 배치되는 것이 아닌지 묻자, 유 팀장은 어떤 이유로 해외로 나가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한국 기업의 매출에 80~90%가 수출인 상황에서 외국에 투자할 수밖에 없다”라면서도 “문제는 전략적 투자가 아닌 경우”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할 수 있는 사업까지 해외로 넘기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이어 “비용 절감 차원에서 나가는 것은 막아야 한다”라며 “규제가 많아서, 일하기가 힘들어서 국내 사업을 접고 외국으로 가는 경우는 피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삼성이 스마트폰 제조를 중국에 맡긴다고 선언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유 팀장은 콕 집어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이 연간 스마트폰 생산량의 20%를 중국 업체에 넘기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삼성의 ‘탈(脫)한국’ 움직임은 각종 규제 등으로 국내에서 가격경쟁력을 더 확보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유 팀장은 혁신을 '양날의 검'으로 규정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정책적 지원만을 믿고 벤처기업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난립하는 경우를 언급하면서다.
그는 "최근 정부가 혁신에 대해 정책자금 많이 쏟고, 투자를 많이 하지만, 그런 걸 악용하는 경우도 많다"며 "성실한 사람들도 많지만, 일부에서는 '공돈'인 정책자금만을 믿고 창업하는 경우도 많다"라고 지적했다.
이른바 '도덕적 해이'다.
대안으로 대기업의 인수합병(M&A) 활성화를 유 팀장은 제시했다.
그는 "대기업은 투자할 때 해당 기업에 대해 치밀하게 평가를 한다"라며 "대기업 등 민간이 벤처시장에 투자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유 팀장의 생각과는 반대로, '규제야말로 혁신의 근간'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목소리도 있다.
최근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은 최근 “혁신을 위해서는 공정경제가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과 중소ㆍ혁신 기업 간의 공정한 관계가 형성돼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회가 형성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유 팀장은 이에 대해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규칙을 정해둘 필요는 있다”라고 인정하면서도 “지금 상황에서 공정경쟁이라는 것은 대기업 규제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정부가 엄격하게 중소기업의 편에만 서는 것은 되레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최근 정부의 규제 강화 정책에는 대기업은 나쁜 놈, 중소기업은 착한 놈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라며 “올바르고 건전한 경쟁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이야말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하위법령 통해 규제강화, 문제 소지 있어…소부장 국산화 쉽진 않을 것" = 얘기는 자연스럽게 최근 정부의 정책 방향으로 넘어갔다.
유 팀장은 "올해 상반기 들어 하위법령 개정 통해 공정경제나 경제민주화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 공정위에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과 '공시 대기업집단 소속회사의 중요사항 공시 등에 관한 규정'을 행정 예고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주회사 체제에서 여러 자회사의 손자회사 공동 출자를 금지하는 내용이 골자다. 자ㆍ손자회사 등과 50억 원 이상의 대규모 내부거래를 하는 지주회사에 이사회 의결 및 공시 의무를 부과하는 내용도 담겼다.
유 팀장은 "기업에 출자를 금지한다는 것은 굉장히 근본적인 사안에 대한 규제"라며 "출자를 못 한다는 것은 투자를 못 하게 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이어 "자회사에 대한 부동산 임대료 수익을 공개하는 것도 정당성이 없다"라며 "배당으로 100% 받아야 하는 건지, 몇 퍼센트를 배당으로 받아야 하는 건지 등 기준이 있을 수도 없는데 여론을 이상한 쪽으로 끌고 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 맥락에서 유 팀장은 하위법령을 통한 정책 집행에 대한 문제도 제기했다. 기업경영의 핵심 사안을 규정하면서 법률로 하지 않고 시행령에 담아서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유 팀장은 "국회가 공전하는 중에 정부에서는 하위법령으로라도 정책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앞으로도 이런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에 따른 여파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견해을 밝혔다.
일각에서 이번 사태를 소재ㆍ부품ㆍ장비 산업의 국산화 등 기초산업 혁신의 가능성과 연결짓는 시각이 있다.
최근 김택중 OCI 대표도 자사 콘퍼런스콜에서 "한국과 일본의 분쟁에 따른 영향이 나쁘진 않은 것 같다"라며 "최근 반도체 실리콘을 늘려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유 팀장은 "참 어려운 문제"라면서 "소재 부품 사업이 1~2년 사이에 따라잡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 쉬울 것 같았으면 더 일찍 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이어 "소재 부품 분야가 특허도 특허지만, 그것보다 노하우가 굉장히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며 "요새 중국이 반도체 사업을 한다고 돈을 쏟아붓지만, 단시간에 따라잡기 어렵다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노하우의 여부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소부장의 국산화는) 낮은 순도의 여러 화학제품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고순도 제품들을 단시간에 쫓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국과 일본은 과거 문제로 얽힌 게 많긴 하지만 가까이 있는 이웃"이라며 "외교의 정상화나 한일 관계의 정상화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