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지주회사의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소유가 원칙적으로 허용되면서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빗장이 열렸다. 그러나 펀드를 조성해도 총수 일가가 지분을 가진 회사에는 투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외부자금도 40%까지만 조달할 수 있는 등 반쪽짜리 규제 완화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30일 발표한 ‘일반지주회사의 CVC 제한적 보유’ 추진방안'의 핵심은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등의 영향으로 벤처투자가 급감함에 따라 지주회사도 벤처투자에 나설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구글의 지주회사 '알파벳'이 설립한 '구글벤처스'는 우버 등 다수의 투자 성공사례를 창출하는 등 CVC는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며 "세계적 흐름에 뒤처지지 않으면서도 대기업 자금의 벤처투자 확대, 회수시장 활성화를 통한 벤처투자 선순환 생태계 구축, 우리 경제의 혁신성·역동성 강화를 위해 한국도 일반지주회사의 CVC 소유를 원칙적으로 허용한다"고 말했다.
CVC는 회사법인이 대주주인 벤처캐피털이다. 현재도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 신기술사업금융업자(신기사) 등이 CVC로 분류된다.
그간 금융과 산업간 상호 소유나 지배를 금지하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일반지주회사는 금융회사인 CVC를 보유할 수 없었다. 이에 대기업들은 일반지주회사 체제 밖에 있는 계열사나 해외법인을 통해 우회적으로 CVC를 설립해왔다.
정부는 대기업이 벤처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일반지주회사의 CVC 보유를 허용하는 내용으로 공정거래법을 연내 개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규제 완화라고 하기엔 달린 꼬리가 너무 많다는 점이다. 허용이라는 원칙 아래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 조항이 산더미다.
우선 일반지주회사가 지분을 100% 보유한 완전자회사 형태로만 CVC를 설립해야 한다. 지분을 일부만 가진 자회사, 손자회사 등의 형태로는 만들 수 없다.
CVC 차입 규모를 벤처지주회사 수준인 자기자본의 200%로 제한한 것도 규제다. 기존 창투사(1000%)나 신기사(900%)의 차입 한도에 비해 제약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금산분리 원칙 훼손이나 재벌의 사금고화에 대한 우려를 막기 위한 조치라지만 일반지주회사가 보유하는 CVC의 업무 범위와 외부자금 조달 비율, 투자처 등을 제한한 점도 투자 활성화에 물을표를 찍게 한다.
일반지주회사가 보유하는 CVC는 창투사나 신기사 등 형태에 관계없이 투자 업무만 할 수 있고 융자 등 다른 금융업무는 해선 안 된다.
투자도 총수 일가가 지분을 가진 회사, 계열회사, 공시대상기업집단이나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회사에는 할 수 없다. 이외의 회사에 대해서는 투자지분율 규제가 따로 없다.
해외 투자는 CVC 총자산의 20%까지만 가능하다.
펀드 조성 시 외부자금은 펀드 조성액의 최대 40%까지만 조달할 수 있고, 총수일가, 계열회사 중 금융회사는 CVC가 조성하는 펀드에 출자할 수 없다.
정진욱 공정거래위원회 기업집단국장은 "외부자금조달 허용 비율을 50%도 가능하다고 봤지만 지주회사의 책임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40%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금산분리 원칙을 완화했다고는 하지만 업무 범위와 투자처, 외부자금 조달 비율 등 규제 조항이 너무 많아 실질적인 투자가 이뤄질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