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집단 소속 상장사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의 원안가결률이 거의 10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50억 원 이상의 계열사 간 대규모 내부거래 안건 중 1건을 제외한 모든 안건이 원안 가결됐다.
대주주와 경영진 감시를 통해 기업 경영 투명성을 높여야 할 사외이사가 제대로 심의에 나서지 않고 이사회의 거수기 노릇만 하는 것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0년 공시대상기업집단(자산총액 5조 원 이상·이하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 현황' 분석 결과를 9일 발표했다. 조사 대상은 올해 지정된 58개 대기업집단 소속 2020개(상장사 266개) 회사이며, 조사 기간은 2019년 5월 15일∼2020년 5월 1일이다.
분석 결과 대기업집단 소속 상장사 266곳의 이사회 상정 안건은 총 1696건이며 이중 사외이사 반대 등으로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0.49%(31건)에 불과했다. 상정된 안건의 99.5%가 원안대로 의결됐다는 얘기다. 총수 일가 사익편취 규제대상에 해당하는 상장사의 경우 이사회 원안가결률이 100%였다.
무엇보다도 이사회 안건 중 대규모 내부거래 관련 안건은 692건으로 이 중 1건을 제외한 모든 안건이 원안대로 가결됐다.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사에 설치된 사외이사 후보 추천위원회(의무)·감사위원회(의무)·보상위원회(자율)·내부거래위원회(자율)에 상정된 안건 2169건 중 원안대로 통과되지 않은 안건은 13건이었다. 원안가결률이 높은 위원회는 추천위원회(99.6%), 감사위원회(99.6%), 내부거래위원회(99.5%), 보상위원회(98.0%) 순이었다.
경영진 감시 기능을 담당하는 사외이사와 위원회가 여전히 '거수기'나 '예스맨'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공정위는 이사회와 위원회에서 대규모 내부거래에 대한 심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규모 내부거래 상정 안건 256건의 작성 현황을 보면 수의계약으로 체결한 내부거래 안건(253건) 중 수의계약 사유를 기재하지 않은 안건이 198건으로 전체 안건의 78.3%에 이른다. 시장 가격 검토·대안 비교 및 법적 쟁점 등 거래 관련 검토사항이 별도로 기재되지 않은 안건도 184건으로 71.9%에 달했다. 거래 상대방, 계약 체결 방식, 계약 기간 및 계약 금액만 기재된 안건도 5건 존재했다.
결과적으로 사외이사와 위원회의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일감 몰아주기 등 대기업집단의 부당 내부거래가 이뤄질 개연성이 높은 셈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부당 내부거래 방지를 위해 사익편취 규제대상 상장사의 총수 일가 지분율을 20%로 낮추는 등 규제대상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며 "기업 스스로도 이사회나 내부거래위원회의 안건심의를 내실화하려는 자정 노력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총수 있는 51개 대기업집단 소속회사 1905곳 중 총수 일가가 1명 이상 이사로 등재된 회사의 비율은 16.4%(313개 사)였다. 그러나 주력회사(39.8%), 지주회사(80.8%), 사익편취 규제대상(54.9%) 및 사각지대 회사(22.2%)에서 총수 일가 이사 등재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또 삼성, 현대차 등 18개 총수 있는 대기업집단 소속 회사는 계열사 퇴직임직원 출신 42명을 사외이사로 선임했는데 이 중 18명이 사익편취 규제대상 및 사각지대 회사 소속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주력회사나 총수일가 소유 지분이 많은 회사 등에 총수 일가 이사 등재 비율이 높고, 계열사 퇴직임직원 출신의 사외이사가 적지 않다는 것은 이사회의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을 키우는 대목이다.
아울러 대기업집단 소속 공익법인(181개) 중 계열사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공익법인(64개)에 총수 일가가 이사로 등재된 비율은 62.5%에 달했다. 총수 일가가 공익법인을 사회적 공헌활동보다 편법적 지배력 유지·확대에 활용할 가능성이 농후한 셈이다.
공정위는 "이를 막기 위해선 공익법인에 대해 계열사 보유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제한하는 등 제도 개선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