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협상 주도할 사람조차 없어
채널 총동원해 무역·안보 지켜내야
장편 애니메이션 ‘모아나 2’의 주인공 일행이 생고생하며 찾아가는 섬이 있다. 모투페투다. 바다 세상의 중심지다. 거기에 도달해야 저주를 깨고 세상을 다시 연결할 수 있다. 모아나 일행이 생고생을 치르는 것은 천둥의 신 ‘날로’ 때문이다. 섬을 축으로 펼쳐지는 뱃길을 통해 교류와 소통이 재개되면 자기 힘이 약해질까 봐 바닷속에, 천둥 속에 섬을 숨겼다. 괴물도 풀었다.
현실 세계는 다르다. 섬을 찾을 이유가 없다. 세상을 묶는 연결의 힘은, 그 혜택은 많은 사람이 이미 누리고 있다. 좁게는 자유무역, 넓게는 시장에서 나오는 힘이다. 영국 저술가 매트 리들리는 ‘이성적 낙관주의자’에서 곡물법과 항해조례, 관세를 철폐하며 황금기를 구가한 19세기 영국 등을 예시하며 교류와 소통을 칭송한다. “보호주의는 빈곤을 부르지만 자유무역은 번영을 가져다준다. 역사가 주는 교훈”이라고. 그는 “너무도 뻔하고 명백한 교훈이어서, 누군가 혹시라도 이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기 힘들 정도”라고도 했다. 현실 세계의 모투페투를 기리는 찬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제사회가 같은 결론을 내고 집단행동에 들어간 지도 오래됐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을 도출한 1947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도 있다. 무역 규제를 없애거나 줄여나가려는 기구다. 교류의 길을 폭넓게 여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복잡해서,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영국 곡물법의 경우 지주 세력은 끝까지 법 철폐에 저항했다. 1929년 거품이 터진 대공황 시기에 미국에선 스무트·홀레이 관세법이 등장해 평균 관세율을 59%까지 높였다. 전제군주나 독재자, 혹은 권위주의 정권이 자유무역의 숨통을 조인 사례는 너무 많아 일일이 거론할 수도 없다. 모투페투의 적은 도처에 있다.
현시점에 가장 꺼림칙한 것은 내년 1월 20일 출범하는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은 ‘보편관세 10~20%’를 입에 달고 다닌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본향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체제에서 날로가 툭 튀어나오니 기겁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가 적대시하는 중국은 제쳐놓더라도 궁지에 몰린 국가가 이미 여럿이다.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는 ‘주지사’로 불리는 모욕을 당했다. 트럼프는 10일 소셜미디어에 “조만간 주지사를 다시 만나 관세 및 무역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길 기대한다”고 썼다. 트뤼도 총리가 보복관세를 시사하자 조롱으로 응수한 것이다. 앞서 지난달 트럼프가 취임 즉시 멕시코와 캐나다에 25%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트뤼도가 미국으로 건너가 수습을 시도한 일이 있다. 별무성과였던 모양이다. 트럼프는 “차라리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라”는 막말을 했다. ‘주지사’ 호칭은 그 연장선상의 추가 모욕 아이템이다.
불편한 진실은, 캐나다 처지가 딱하지만 대한민국은 그런 처지도 못 된다는 점이다. 캐나다는 그래도 정상 채널을 가동한다.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한국만 낙동강 오리알이다. 하필 이 결정적 시기에 탄핵 정국을 맞은 탓이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14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돼 국내 정치 불확실성은 그나마 줄었지만, 앞길은 여전히 먹구름 속이다. 특히 자유무역의 길이 그렇다.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문제도 걱정이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빅터 차 한국 석좌는 최근 “미국 차기 정부 출범 첫 100시간이 한국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개별 협상을 시도하는데 한국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했다. 따끔하고 답답하다.
모아나는 깊은 바닷속으로 뛰어든다. 날로가 가라앉힌 섬에 닿아 세상을 하나로 묶겠다는 일념에서다. 우리도 간절하고 절박하게 나서야 한다. 자유무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생명줄이다. 현실 세계의 모투페투다. 트럼프와 통할 수 있는 채널을 총동원해 그 섬을 온전히 지켜내야 한다. ‘한국 패싱’이 없게 안보외교 측면을 세심히 살피는 일도 급하다. 모아나는 길이 막힐 때마다 “언제나 다른 길은 있다”고 주문처럼 되뇐다. 한 권한대행을 비롯한 여야정 리더들도 그렇게 되뇌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간절하고 절박하면 없는 길이 생길지도 모른다. trala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