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임 때보다 퇴임 후 더 빛났던 카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인권문제 논쟁
100세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한국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는 재임 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국제분쟁 해결사로 지구촌 곳곳을 누볐다. 북한도 세 차례나 방문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ㆍ북핵 문제 해결 등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바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당선 이전부터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공약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 아래에 있던 한국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았던 것.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거치면서 단단해진 한미 양국의 혈맹 관계는 곧바로 위기에 내몰렸다.
카터는 본격적인 재임 기간(1977~1981년)이 시작하자 마다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추진했다. 미군 철수는 물론, 당시 한국에 배치했던 ‘전술 핵무기’까지 철수하겠다고 공언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한국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는 카터 행정부를 향해 불편한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바로 “내정 간섭을 중단하라”며 반감을 표출했다. 베트남전쟁 파병까지 감수했던 박 전 대통령으로서 카터의 취임 이후 행보가 못마땅했을 것으로 추측됐다.
한미 양국의 신경전은 카터가 취임 5개월 만에 단행한 방한 때 극에 달했다. 주한미군 철수를 놓고 양국 정상이 협상장에서 충돌한 것.
20188년 공개된 백악관 외교 기밀문서에 포함된 당시 회담 대화록에는 청와대에서 열린 양국 정상의 설전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당시 비밀리에 자체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카터는 핵무장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이런 와중에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위 '암스트롱 보고서'가 나오면서 미국 의회의 기류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를 의식한 카터 행정부도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결국 보류했다.
카터 전 대통령과 한반도의 인연은 퇴임 후 더욱 조명을 받았다.
그의 시선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구도와 긴장을 이완하고 평화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카터가 한반도 문제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북핵 1차 위기가 극에 달했던 1993년 6월이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한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미국의 영변 폭격설까지 대두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카터는 당시 '평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북한 김일성 국가주석과 북핵 문제에 대한 담판을 짓겠다며 빌 클린턴 행정부에 방북 승인을 요청했다. 이후 방북이 성사되면서 김 주석과 처음으로 대면했다.
이를 통해 △3단계 북미회담 재개 △영변 핵시설에서 무단 인출한 핵연료봉의 재처리 유보 △경수로를 제공할 경우 흑연감속로를 포기 등에 합의했다.
1차 방북을 통해 북미 협상의 물꼬를 텄던 카터 전 대통령이 다시 한반도 문제에서 존재감을 보인 것은 그로부터 16년 후인 2010년 8월이었다.
당시 8년의 노동교화형을 받고 복역 중이던 아이잘론 말리 곰즈씨의 석방을 위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승인을 얻고 평양을 방문한 것. 석방 교섭 차원을 넘어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하겠다는 카터 전 대통령의 개인적 동기가 컸다.
카터 전 대통령은 북한 당국으로부터 곰즈씨의 사면을 끌어내며 그와 함께 귀환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카터 전 대통령이 설립한 카터 센터는 지난 2014년 12월엔 내란음모·선동 혐의로 재판을 받는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구명을 위해 대법원에 성명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성명서는 유죄판결이 군사독재 시절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에 따라 선고됐다고 지적했다.
이보다 앞서 1981년 퇴임한 이후에는 당시 한국 군부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한국 내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퇴임 후에도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