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그룹이 9일 24조3000억 원의 국내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20조4000억 원보다 19% 늘어난 그룹 사상 최대 투자액이다. 다른 대기업도 가세할 전망이다. 삼성전자의 한종희 대표이사 부회장과 전영현 DS부문장 부회장은 공동 신년사에서 “지금은 인공지능(AI) 기술의 변곡점을 맞이해 기존 성공 방식을 초월한 과감한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성공에 확신을 갖고 신속한 실행과 끊임없는 혁신을 하겠다”고 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공격적 투자는 엄중한 위기의 반작용이다. 맨주먹으로 무에서 유를 창출한 대한민국 창업세대의 투혼이 후대에도 살아 있다는 뜻이니 여간 반갑지 않다. 5000만 국민에겐 가뭄의 단비가 따로 없다. 계엄·탄핵 정국으로 지난 연말 이후 국정이 표류하는 개탄스러운 상황이지만 생산과 고용의 주체인 기업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 ‘다시 해보자’는 의욕이 용솟음칠 수 있다. 재계 일반의 위축된 투자심리를 되살리는 불씨 역할도 기대된다.
한국 자본시장에 참여한 외국인은 국내 간판급인 삼성전자에 대해 지난해 ‘팔자’에서 올해 ‘사자’로 돌아선 감을 주고 있다. 추세적 변화인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1월 효과’ 기대감이 커진 것만은 틀림없다. 선도 기업들의 적극적 투자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극복과 밸류업에 도움되게 마련이다. 우리 증시도 얼마든지 효율적인 시장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기업의 투자 참여는 그 활력소가 될 수 있다.
잊어서는 안되는 것도 있다. 위험 없는 투자는 없다는 사실이다. 투자 규모가 커질수록 위험 지수도 높아진다. 기업 활동을 돕는 제도적 기반이 다져지지 않는다면 기업은 헛돈을 쓰고 정부는 재정난으로 휘청이는 최악의 코스로 직진할 수도 있다. 민생도 망가진다. 굳이 남미 국가들을 돌아볼 것도 없다. 다 함께 망하는 지름길이다. 기업 투자가 백사장에 물 붓는 격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와 정치권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반도체 등 우리 수출 성장엔진이 꺼지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크지 않나. 한시가 급하다.
한국은행은 올해 수출 증가율을 1.5%로 내다보고 있다. 국내외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내려앉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올해 첨단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대중 무역 장벽 강화 여파로 한국의 대중 수출도 타격을 받는 등 역풍이 예상돼 수출이 경제 성장을 주도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라고 했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의 수출이 어렵다면 국가 경제가 어찌 되겠나.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면서 기업을 응원해야 한다.
미국만이 아니다. 일본·중국·유럽 등도 경제살리기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세제·금융 혜택을 쏟아부으며 기업을 돕고 수출·내수 회복에 안간힘을 쓴다. 한국만 외딴섬이다. 여야 모두 경제·민생은 안중에 없이 차기 대선 시간표만 노려본다. 황금알을 원하면 거위를 키워야 한다. 기업이 흔들리면 경제가 무너진다. 최고의 복지인 좋은 일자리도 사라진다. 경제살리기에 여·야·정이 따로일 수가 없다. 당장 힘을 모아 규제의 장벽을 허물고, 반도체특별법이나 전력망확충특별법과 같은 산업 살릴 법안을 처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