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곧이어 닥친 글로벌 수요부진으로 D램 가격이 폭락하고 과도한 부채가 짐이 되면서 위기에 빠졌다. 결국 2002년 경영권이 채권단에 넘어갔다. 채권단은 수차례 주인 찾기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러다 워크아웃 10년 후인 2012년 2월 SK그룹 품으로 들어갔다.
우여곡절은 이듬해 또 있었다. 반도체 사업을 진두지휘하던 최태원 회장이 횡령 혐의로 구속되면서, 재계에선 ‘오너 부재’의 한을 푼 SK하이닉스가 이번에는 ‘오너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반면 삼성전자는 이병철 창업회장의 메모리반도체 사업 진출 시 어려움을 겪은 일을 빼면 상대적으로 순조로운 길을 걸었다. 글로벌 반도체 치킨 게임과 업황 사이클에 따른 부침 등은 있었지만, 기술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초격차’ 삼성 반도체를 이끌어 왔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의 지위도 수십 년간 이어갔다.
두 회사 위치에 변화가 생긴 건 인공지능(AI) 시대가 도래하면서부터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영업이익 23조4673억 원으로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냈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영업이익 15조1200억 원)보다 8조 원 넘게 더 벌었다. AI 시대를 겨냥한 고대역폭 메모리(HBM) 기술 패권을 잡으면서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 2위’라는 딱지를 떼어 버렸다.
삼성전자와 함께 글로벌 반도체 업체 상징인 인텔의 위기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0년 초 스마트폰 태동기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최근엔 AI 열풍에서도 밀려나면서 회사의 기둥뿌리가 흔들리고 있다. 기술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혁신하지 않으면 1등 자리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1등을 끌어내린 1등도 또다시 누군가에게 밀려날 수 있다.
노키아는 1990~2000년대 초반까지 노키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휴대폰을 만들었다. 하지만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시장에서 밀려났다. 애플과 삼성전자가 이후 주도권을 잡았는데, 최근에는 중국 기업들이 빠르게 점유율을 높이며 위협하고 있다.
메타(옛 페이스북)는 마이스페이스 등 2000년대 초반 등장한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빠르게 대체하며 최대 기업으로 부상했지만, 젊은 층의 이탈과 틱톡의 급부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최근 세계 시장을 강타하고 있는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가 선보인 추론 AI 모델 ‘딥시크 R1’은 그간 엔비디아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AI 반도체 시장 지형을 바꿀 수 있는 기폭제로 평가받는다.
딥시크가 내놓은 AI 모델은 미국 최고 모델의 10분의 1도 안 되는 비용을 들여 개발됐지만, 성능은 이에 버금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미국 테크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에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던 엔비디아 주가는 지난달 27일 17% 폭락했고, 여파는 계속되고 있다. 딥시크의 가성비가 세상에 알려진 후, 가장 밤 잠을 설친 사람은 젠슨 황 최고 경영자(CEO)일 것이란 얘기는 설득력이 있다. 엔비디아 우군인 SK하이닉스로서도 반갑지 않다.
글로벌 시장에서 ‘영원한 1등’은 없다.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혁신하는 기업만이 살아남는다. PC 시절 절대 강자였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시대에 뒤처지며 “제국이 무너진다”는 소리까지 들었던 마이크로소프트는 이후 클라우드 시장에 집중하며 재도약에 성공했다. 1등이라고 안주해서도, 2등이라고 좌절할 필요도 없다. SK하이닉스도, 삼성전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