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에 찾아왔을 때는 이미 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많고, 환자가 드물어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습니다.”
말단비대증의 국내 치료 환경에 관해 묻자 유순집 부천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환자들의 고충과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말단비대증은 환자가 많지 않은 희귀질환이라 환우회 등 상호 지지와 목소리를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없다. 질환에 대한 정보를 접하기 어렵고, 증상도 서서히 나타나 조기 진단이 어렵다.
본지는 최근 경기 부천시 원미구 부천성모병원 진료실에서 유 교수를 만나 말단비대증의 진단과 치료에 대해 들었다. 오랫동안 말단비대증 환자들을 진료해온 유 교수는 1984년 LA올림픽 여자 농구 은메달리스트인 고(故) 김영희 선수의 주치의였고, 김 전 선수와 함께 질환에 대한 대중적 인식 개선에 힘써왔다. 현재 대한임상노인의학회 회장, 대한내분비학회 신경내분비연구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말단비대증은 두드러지는 외모 변화를 동반하는 희귀질환이다. 손과 발이 커지는 것은 물론, 코, 턱, 이마 등이 돌출되면서 인상도 변하게 된다. 이 때문에 환자들은 타인의 시선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과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유 교수는 환자들의 신체적 고통만큼, 정신적 고통이 상당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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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교수는 “말단비대증 환자들은 본인의 병을 잘 드러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데, 이 병을 가진 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부족으로 환자들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마치 특이한 동물을 보는 듯한 불편한 시선을 받게 되고, 미묘한 차별을 받는 경험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며 “특히 여성 환자들은 사회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고, 우울증의 위험도 커진다”라고 말했다.
말단비대증으로 인한 신체 변화는 비가역적이기 때문에 조기 치료가 최선이다. 하지만 현재 국내 환자 대부분은 질병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로 첫 진료를 받는다. 눈에 띄는 외모 변화는 아주 서서히 진행돼 초기에 알아차리기 어렵다. 신체 기능에 이상이 생기지 않는 약간의 외모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합병증이 생겼을 때가 돼서야 병원을 찾는 것이다.
유 교수는 “말단비대증이 있으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당뇨병, 고혈압, 심혈관 질환, 암 발생 위험이 증가하며, 특히 얼굴이 변형되면서 수면 무호흡증 발생률이 일반인보다 20배 이상 높아진다”라며 “진단에는 혈액검사, 경구 당부하 성장호르몬 억제 검사, 자기공명영상(MRI) 촬영이 활용되며, 조기에 진단할수록 여러 합병증을 예방하고 치료 예후가 긍정적인 것은 물론 사망률도 줄일 수 있다”라고 조언했다.

환자들은 겉모습뿐 아니라 신체 내부의 기관들도 비대해진다. 이는 심혈관계와 신경계에 타격을 주며, 환자의 사망을 앞당길 정도로 치명적이다. 말단비대증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기대수명이 약 10년 줄어든다는 연구 결과도 보고된 바 있다.
유 교수는 “말단비대증이 발생하면 단지 외모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위장관 등 소화기관과 심장, 갑상선 등 생명 유지에 중요한 주요 내부 장기도 모두 비대해진다”라며 “이 때문에 신장병, 당뇨병, 암, 고혈압 등 심혈관계 질환이 쉽게 발생하게 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부 환자들은 심한 두통이 생기거나 눈이 보이지 않는 등 시야 장애를 경험하기도 한다”라며 “40~50대보다 60대 환자가 드문 이유는 환자들이 그 전에 조기 사망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수술은 말단비대증 치료에 가장 우선되는 선택지다. 대부분 환자는 뇌하수체에 생긴 종양으로 호르몬 이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시행한다. 종양의 크기가 작으면 완치를 기대할 수 있다. 국내 수술 성공률도 높게 유지되는 추세다. 하지만 심장질환이 있거나, 건강 상태에 따라 수술할 수 없는 환자도 있고, 방사선 치료나 약물을 활용한 치료도 시행한다.
유 교수는 “성장호르몬 분비를 억제하고 IGF-1 수치와 뇌하수체 선종의 크기를 줄이는 ‘소마토스타틴 유사체’, 성장호르몬 작용을 막아주는 ‘성장호르몬 수용체 길항제’가 대표적이다. 이들 약제와 함께 ‘도파민 작용제’가 보조적으로 쓰이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감마나이프 등 방사선 요법을 통해 종양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보조적인 치료법으로 이용되며, 수술 후에도 필요에 따라 약물치료를 병행할 수도 있다”라고 부연했다.
따라서 조기 진단이 가능하도록 정보 접근성을 높이고, 환자들이 숨지 않고 진단과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유 교수의 제언이다.
유 교수는 “고(故) 김영희 선수가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질환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대학 강의에 참석해 학생들과 소통하는 등 활동을 펼치면서 말단비대증에 대한 사회적 무지와 편견을 대폭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라며 “환자 스스로 증상을 자각해 병원에 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TV나 인터넷에 말단비대증에 대한 뉴스가 한 번 등장하면 질환을 의심하며 병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평소와 달리 일시적으로 대폭 증가한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유 교수는 “단순히 말단비대증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환자들이 가진 심적 고통과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을 사회적으로 모두가 잘 이해하려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