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억원 제시하며 “중국으로 넘어오라” 유혹
연구 인력 데려가서 반도체 기술력 확보
“기업들, 연구원 지원‧보상 늘려 붙잡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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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년 전 중국 정부가 반도체 산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하던 당시, 헤드헌터로부터 중국 반도체 기업으로 넘어오라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제 연봉의 다섯배에 달하는 급여를 제시했어요. 가족의 이동·체류비·생활비, 아이들 학비까지 지원하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에 솔깃했어죠. 잠시 흔들렸지만 한국 사람으로서 차마 다른 나라로 넘어가 기술을 전파하는 것이 주저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중국으로 줄줄이 넘어갔어요. 그때 갖고 간 반도체 기술이 지금 두 나라의 격차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
중국 반도체 기술의 무서운 성장 속도의 배경에는 기술 유출과 인재 탈취가 한 몫했다. 기술 유출에 대한 사법부의 솜방망이 처벌과 기업들의 안일한 대응, 방심이 결국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이다.
18일 업계에 따르면 수원지법은 조만간 공판을 열고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 혐의를 받는 중국계 A 회사 대표 B 씨와 설계 팀장 C 씨 등에 대한 심리를 시작한다. A 회사 등 법인 3곳과 회사 직원 등 관련자 9명도 함께 재판을 받게 된다.
검찰에 따르면 B 씨는 2021년 10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삼성전자의 반도체 장비제조 자회사 세메스 출신 퇴사자로부터 세정장비 도면 등을 활용해 장비를 제작하고 중국에 수출하려 한 혐의를 받는다. 반도체 세정 기술은 이물질을 정밀하게 제거하는 핵심으로, 정부가 지정하는 국가 핵심 기술이다.
B 씨는 삼성전자 출신 엔지니어들을 영입해 세정장비 관련 사업 업체를 설립했고, 중국 반도체 장비업체의 투자를 약속받았다. 무려 78억2000만 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한 뒤, 모든 인력과 기술을 중국 회사로 넘기기로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들이 기술을 팔아 돈을 챙기는 동안 우리 기업의 반도체 기술은 고스란히 중국으로 넘어갔다. 반도체 분야의 기술과 인재 유출로 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국가의 산업 주권과 미래 성장 동력까지 떨어뜨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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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유출은 유독 반도체 분야에 특히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10월 관계부처가 합동으로 발표한 ‘글로벌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유출 대응방안’에 따르면 2020년부터 지난해 8월까지 기술 유출 분야 가운데 반도체가 40건(41%)로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디스플레이 18건(19%), 전기·전자 6건(6%) 순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첨단산업 분야 기술 유출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고도화하는 양상이다. 연구 인력 이직을 제안하거나 국내기업 설립·인력 고용, 인수·합병(M&A)후 이전 등의 방식이다.
기술 유출에 대한 기업의 인식이 안일한 점도 문제로 꼽힌다. 특허청은 기술유출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중소기업 기술보호 역량이 여전히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대학·공공연구기관의 기술보호 인식·관리가 미흡한 점도 지목했다.
연구 인력의 해외 이직은 국가적인 손실로 이어졌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평가한 ‘두뇌 유출 지수’에서 우리나라는 2021년 24위에서 2023년 36위로 추락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좋은 근무환경과 수십 억원대의 연봉을 제시하는 중국과 고된 노동에 1억~2억 원 남짓 받는 한국 중 어떤 선택을 하겠냐”면서 “연구원들을 잡아둘 수 있게끔 지원과 보상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심대용 동아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고급 인력들은 은퇴 후 갈 수 있는 곳이 팹리스 업체 외에 그리 많지 않다”며 “고급 인력들이 CIS(이미지센서 반도체)나 낸드 컨트롤러 등 특정 분야의 파운드리에서 일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