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이노베이션 등급 강등을 시작으로 해외 신용평가사의 국내 석유화학 업체에 대한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연간 영업이익이 80% 급감하는 등 부진한 실적을 기록한 데다 신용등급 하향 트리거를 충족하면서 등급 강등 부담이 높아진 모습이다.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중국발 증설과 설비투자 확대 등으로 수익성 회복이 제한적인 여파다.
16일 신용평가업계에 따르면 글로벌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14일(현지시각)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신용등급을 투자적격 등급인 기존 ‘Baa3’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인 ‘Ba1’으로 하향 조정했다. 무디스는 등급 조정 사유에 대해 “배터리 부문의 지속적인 부진과 높은 부채 부담”을 지목하며 향후 2년간 높은 부채 부담이 지속할 것으로 전망했다.
글로벌 신평사에서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강등됐다는 것은 국내 신용평가사에서도 신용등급 하향 가능성이 커졌다는 의미다. 통상 글로벌 신용등급은 국내 신용등급보다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LG화학의 국내 신용등급은 ‘AA+, 안정적’(한신평)이지만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S&P에서는 ‘BBB+, 부정적’으로 5노치(notch) 이상 낮게 평가된다.
국내 신용평가 3사는 SK이노베이션의 선순위 무보증 사채 신용등급을 ‘AA, 안정적’, 단기 기업어음(CP) ‘A1’으로 우호적 평가하고 있다. 이는 단기 사채는 가장 높은 등급 수준이다. 국내 신평업계의 SK이노베이션 신용등급 조정은 2020년이 마지막이었다.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는 당시 ‘AA+, 부정적’에서 ‘AA, 안정적’으로 신용등급을 하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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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이노베이션은 국내 석유화학시장 생산능력 1위 업체로, 배터리 부문은 글로벌 5위까지 보유한 곳이다. 석유개발(E&P)에서 정유, 윤활유, 배터리까지 다각화된 사업기반을 바탕으로 계열사 간 수직계열화된 생산 체계를 확보하고 있다. 자회사인 SK에너지, SK인천석유화학의 나프타 부문은 한때 최고 지위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적극적인 사업 확장 추진에도 대규모 설비투자 회수가 지연되면서 이들 자회사에 적신호가 켜졌다. 전기차 배터리 사업을 주력으로 하는 계열사 SK온은 과거 신사업 동력으로 기대감을 모았지만,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불확실성으로 적자를 지속 중이다. 여기에 트럼프 당선으로 당분간 배터리 전략 변경 등에 따른 재무 변동성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연간 실적은 매출 74조7170억 원, 영업이익 3155억 원을 기록했다. 4분기 영업이익이 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해 1599억 원을 기록했음에도 연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84.3% 감소했다. 정제마진 부문이 최근 반등했지만, 시장에서는 여전히 우려의 시선을 쉽사리 지우지 못하고 있다. 4분기 흑자전환은 합병한 SK이노베이션 E&S 실적이 반영된 일회성 요인이다.
SK이노베이션의 연결 기준 재무지표는 현재 국내 신평사들이 제시한 등급 하향 트리거 요인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 지난해 ‘순차입금/EBITDA’ 비율은 12.5배로 2023년 5.16배보다 훌쩍 증가했다. 이는 한국기업평가의 변동 요인인 순차입금/EBITDA 지표 4배 초과는 물론, 이보다 느슨한 기준을 적용한 한국신용평가의 순차입금/EBITDA 7배 초과도 웃도는 수준이다.
순차입금은 증가하는 반면 EBITDA는 줄어들고 있다. 2023년 말 17조1393억 원이던 순차입금은 작년 말 31조265억 원으로 급증했다. 같은 기간 EBITDA는 3조3168억 원에서 2조4777억 원으로 집계됐다. 업황 악화로 영업활동에서 발생한 현금흐름인 EBITDA는 줄어드는 반면, 총차입금에서 현금성 자산을 제외한 순차입금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신규 투자는 줄었지만, 기존에 발행됐던 채권의 이자 부담이 가중된 영향이다. 석유화학 업황 부진이 지속하는 가운데 코로나19가 시작되던 2020년 신용등급이 AA로 강등됐다. 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추가 자금 조달을 위해 차환(신규 발행)할 때 마다 금리 레벨이 올라간 것이다. 고강도 금리 인상기를 맞은 점도 차입금 규모 축소에 부정적 영향으로 작용했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를 차환 대신 현금 상환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난해 1월 만기 도래한 2500억 회사채를 전액 현금 상환했으며, 지난 1월 만기가 돌아온 5년물 1100억 원의 만기도 공모채 시장을 두드리지 않고 상환했다. 대규모 투자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차입금이 확대하는 것을 관리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