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통상·민생 등 3대 분야 중점
“4월 국회 통과 협조요청”…野 반발
정부가 미국발(發) 상호관세 등 통상 리스크와 초대형 산불 사태 대응을 위해 10조 원 규모의 필수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을 추진하기로 했다. 탄핵 정국에 뒷전으로 밀렸던 추경론이 산불을 계기로 다시 부각됐지만, 예비비 복원 여부 등 각론을 둘러싼 여야 대립에 타결까지 험로가 예상되자 정부가 선제적으로 ‘추경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긴급현안 관련 경제관계장관간담회에서 “시급한 현안 과제 해결에 신속하게 집행 가능한 사업만을 포함한 10조 원 규모의 필수 추경을 추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2·3 계엄 사태 이후 정부가 추경을 공식화한 것은 처음이다. 계엄 이후 소비·투자 등 내수 부진 장기화,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에 따른 통상 정책 변화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극대화하면서 경기 부양을 위한 추경론이 간헐적으로 제기됐지만 정부는 신중론을 유지했다. 올해 초 기재부가 발표한 ‘2025년 경제정책방향’에도 ‘경기 상황에 따라 필요 시 추가 경기보강방안 강구’ 등의 우회적 표현이 사용됐다.
다음달 2일 미국 정부의 상호관세 발표에 따른 수출 타격 우려에 최근 여의도 면적 166배 규모인 4만8000헥타르(ha)를 불태운 영남권 산불 사태가 정부의 이번 추경 발표 촉매가 됐다.
통상 상호관세는 교역국이 부과하는 관세만큼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올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고한 상호관세는 각국의 대미 관세율에 더해 교역국 조세·법률 등 비관세 장벽까지 고려한다는 구상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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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등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국가도 예외 없는 관세 부과를 예고한 만큼 국내 수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작년 대미 무역수지 흑자는 전년대비 25% 증가한 557억 달러로 역대 최대치였다. 2020년(166억 달러)대비 3.4배 증가했다. 미국 입장에서 주요 무역 적자국인 한국이 ‘미국에 상당한 관세를 부과하는 15개 국가’를 의미하는 ‘더티 15’(지저분한 15)에 포함될 가능성도 있다.
글로벌 관세 전쟁이 초읽기에 접어들었지만 추경 논의는 공회전을 거듭했다. 여야정은 1월 국정협의회에서 실무협의를 거쳐 추경 가이드라인을 정하자는 원론적인 공감대 형성 후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였다. 앞서 민주당은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최 부총리가 마은혁 헌법재판관 후보자를 임명하지 않자 추경 논의에서 배제했다. 기재부는 합의된 가이드라인이 없다면 신속한 추경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올해 본예산에 반영된 △예비비 2조4000억 원 △부처별 재해재난대책비 9700억 원 △재해복구 국고채무부담 1조5000억 원 등으로 산불 대응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더해 자체 추경안 내 국민안전예산 9000억 원, 민생회복소비쿠폰 등 소비진작 패키지로 산불 피해를 입은 영남권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절반 삭감한 예비비 복원을 위한 추경이 필요하다고 맞섰다. 올해 예비비 2조4000억 원에서 목적예비비 1조6000억 원 중 1조3000억 원은 고교무상·5세 무상교육에 사용하도록 예산총칙에 명시하고 있어 재난에 사용가능한 목적예비비는 3000억 원대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부여당의 주장이다. 1조 원에 달하는 부처별 재난복구비도 대개 용처가 정해져 있거나 이미 집행이 완료돼 실제 가용 예산은 2000억 원 수준으로 보고 있다. 일종의 ‘외상비’ 개념인 국고채무부담도 이번 산불 대응에 당겨쓸 경우 여름철 홍수·태풍 등 추가 재해 발생시 대응력이 떨어진다고 본다.
기재부 관계자는 “2019년 강원도 산불 때도 재난 복구에 수조 원이 들었는데 현재 가용자원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며 “민주당이 말한 4조 원대 대응 예산은 관련 예산을 단순 합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예비비 논쟁은 헌재 선고를 남겨둔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과 무관치 않다. 지난해 12·3 비상계엄 선포 배경으로 윤 대통령은 민주당의 예비비 등 감액예산안 단독 처리 등을 주장했다. 민주당 입장에서 예비비 복원은 감액안에 문제가 있다고 자인하는 셈이 되는 만큼 여야 간 한 치 물러섬 없는 설전이 이어질 공산이 컸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통화에서 “관세, 산불, 정치 불안 등으로 위축된 소비가 성장률을 둔화시킬 가능성이 높기에 추경이 필요하지만 정치적 문제로 성사시키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추경이 늦어질수록 내수 침체도 심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 추경에서 △재난·재해대응 △통상 및 AI경쟁력 강화 △민생 지원 등 3대 분야에 중점을 둔다는 계획이다. 추경 규모 10조 원은 정부가 여야 간 이견이 있는 항목을 전부 배제하고 산불·관세 대응 및 내수 진작에 초점을 맞춘 만큼 앞서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산불 사태 전 거론한 15~20조 원, ‘1인당 25만 원’ 등 13조 원 민생지원금을 포함한 민주당의 35조 원 추경안과 차이가 있다.
기재부 고위 당국자는 “산불 때문에 나라가 난리인데 기다려도 되는 게 없으니 반드시 재정이 필요한 곳에 빠르게 투입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정부는 여야가 이러한 추경 취지에 동의한다면 조속히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추경안을 조속히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최 부총리는 국회에 “4월 중 추경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도록 초당적 협조를 요청드린다”고 당부했지만 민주당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추경을 뒷북 제출하면서 급하니 국회의 심사 과정은 생략해 달라는 태도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태도”라며 회의적 입장을 드러냈다. 이어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추경안이 추경 목적에 부합하는지, 민생경제 회복과 성장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