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지도층의 모럴 헤저드가 다시 이슈가 되고 있다. 이동흡 헌법재판소장 후보자의 특정업무경비 사적 유용 의혹과 김용준 국무총리 지명자의 재산과 두 아들의 병역 의혹이 제기된 탓이다. 정부 고위직 인사청문회 때마다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성숙도가 떨어진 때문이라는 게 학자들의 지적이다.
최근 화제가 된 영국 앤드루 왕자의 전쟁 참여, 마이크로소프트(MS)의 공동창업자이자 세계 2위 부호인 빌 게이츠의 69조원 전 재산 사회환원 발표 등 사회지도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과 대조적이다. 이 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전통에 따라 사회지도층으로서 주어진 의무인 ‘실천하는 양심’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초기 로마시대에 왕과 귀족들이 보여 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공공정신에서 비롯된 말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한다.
우리 사회 지도층들은 돈이나 힘 또는 지위는 있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존경받는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선조 중 ‘실천하는 양심’을 보인 명가들이 많았던 점은 깊이 생각해볼 문제다. 대표적인 명가로 경주 최부잣집을 꼽을 수 있다.
경주 교촌에 있는 최부잣집은 약 500년에 걸쳐 12대 만석꾼 9대 진사 가문을 형성한 가문이다. 500년 만석 부잣집으로 부를 유지하면서 부로써 사회 공헌을 해 왔던 경주 최부잣집은 ‘깨끗한 부’를 목표로 세우고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한 명가다. 지금도 최부잣집이 대대로 실천해온 육훈(집안을 다스리는 교훈)과 육연(자신을 지키는 교훈)은 현재 사회지도층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과연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청부(淸富)의 교훈으로 전해지고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 몸소 실천한 △상생경영 △청백리정신 △박애주의 △합리주의 △애국주의 △민족주의 △선린정신 등 정신적 자산은 한국 명가를 넘어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 말할 수 있다.
최부잣집의 대를 이어온 실천적 청부와 상생경영은 가난한 사람들의 존경으로 이어져 동학농민전쟁 때와 6·25전쟁 전후 빨치산의 부자 습격 당시 피해를 보지 않았던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일제 식민지시절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전재산을 담보로 맡겨 백산상회를 운영하다 부도났을 때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명가로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부잣집은 12대 최준1884~1970)에 이르러 현재의 영남대학교 전신인 민립 대구대학 설립에 전재산을 기부하면서 최부잣집 가문 만의 만석부자는 끝났다. 하지만 최부잣집의 만석 재산은 영남대를 통해 최부잣집의 부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이강식 경주대학교 교수는 “경주 최부잣집이 일반인들에 널리 알려진 것은 몇년 전 방영한 드라마 ‘명가’ 때문인데 사회지도층들이 쉽게 최부잣집의 육훈과 육연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며 “육훈과 육연은 단순한 정신이 아닌 실천이 뒤따라야 하기 때문에 쉽게 목표로 내세울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우리 사회지도층이 진정한 노블리스로 존경 받으려면 경주 최부잣집 명가처럼 꾸준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무리 훌륭함을 알아도 부자의 실천과 국민의 존중이 없으면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며 “사회지도층으로서 최부잣집이 실천한 상생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이투데이는 최부잣집의 6훈과 6연의 의미를 되새기는 시리즈를 통해 사회지도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