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리메이크해 개봉한 ‘로보캅’에서 주연보다 조연에 눈길이 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옴니코프의 마케팅담당 포프 역을 맡은 제이 바루첼의 역할은 흥미로웠다. 그는 옴니코프의 ‘스핀닥터(Spin Doctor)’였다. 포프는 미국 경찰에 로봇을 도입하기 위해 대중 선동 전략을 세웠다. 정치권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로보캅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 분)와 옴니코프의 회장 레이몬드 셀러스(마이클 키튼 분)는 각각 정의와 악을 표상하는 허구적 존재 느낌이 강했다. 반면 포프는 정·관계, 기업에 익히 존재하는 현실 속의 인물이었다.
국내 대기업들도 홍보·전략기획 부서를 두고 있다. 기업을 홍보하고 사업전략을 짜는 곳이다. 그러나 이러한 업무만 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마다 직함은 다르겠지만 정·관계와 연결고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도 하나의 업무다.
배임, 횡령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청구된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에게도 스핀닥터 역할을 한 측근 A씨가 있었다. A씨는 2000년대 초반부터 강 전 회장과 함께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 시절 STX그룹에서 핵심 보직을 맡으며 강 전 회장의 주요 업무 결정에 관여했다. 한 때 STX그룹이 삼성전자에 준하는 홍보마케팅 비용을 지출한 것도 A씨가 주도적으로 추진한 결과다. 강 전 회장의 회사 돈 횡령과 이 자금의 정·관계 로비가 사실이라면 A씨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 유력하다.
물론 A씨와 같은 스핀닥터가 필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정부는 정책을 국민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방법론을 고민한다. 기업이 제품 판매를 위해 간접적인 활동을 하는 것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들의 역할이 지나치게 확대될 때다. 포프는 진실보다는 사실의 포장에 주력했고 심지어 왜곡까지 자행했다. 검찰의 말대로 강 전 회장이 회사의 부실을 숨기기 위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하고 A씨가 정부의 지원을 얻기 위해 선물리스트를 만들어 쇼핑백을 돌렸다면 이는 명백한 사법처리 대상이다.
검찰의 이번 수사는 어물쩍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한다. 강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가 있었다면 대상은 누구였는지 낱낱이 밝혀야 한다. 정부와 기업 모두 존재의 이유를 잊었을 때 받는 대가가 무엇인지 명토받고 지나가야 한다.
기자의 스마트폰 메모에는 ‘기자다짐’이라는 폴더가 있다. 여기에는 기자생활을 하며 얻은 취재요령 외에도 ‘언론자유’, ‘진실보도’, ‘올바른 정보사용’, ‘취재원 보호’와 같이 지켜야 할 윤리강령을 적어놨다. 틈날 때마다 읽으며 되새긴다. 하루에 수십 번을 되뇌어도 한번 놓으면 되찾기 어려운 것이 양심이다.
포프는 로보캅에게 비위가 드러난 순간 두 손을 들며 “난 그저 마케팅만 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래서 어쩌라고. 본질을 잊은 목적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