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지운다. 그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이름을 선사한 뒤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다른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중견작가, 유명작가라는 주홍색의 타이틀을 버리고 신인 작가가 된 그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독자들에게 자신이 집필한 새로운 책을 건넨다. 작품으로서만 오롯이 평가받고자 함이다.
지난해 4월 발간된 영국 육군 헌병대에서 수십년 복무했던 사설탐정 로버트 갤브레이스의 추리소설 ‘더 쿠쿠스 콜링(The Cuckoo’s Calling)’은 판타지 소설 ‘해리포터(Harry Porter)’ 시리즈로 유명한 J.K. 롤링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자신의 유명세에 압박감을 느껴온 롤링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작품성으로만 평가받고자 필명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이 좀 더 오래 지켜지길 원했다”는 롤링은 “다른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작품에 대한 지나친 홍보나 기대 없이 독자들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의 작품 ‘하늘의 뿌리’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으로, 일생에 한 번밖에 받을 수 없는 프랑스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중이나 평단이 더이상 순수하게 작품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느낀 그는 에밀 아자르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 대중과 평단의 선입견과 잣대를 무력화시켰다.
이외에도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는 메리 웨스트 매콧이라는 이름으로 로맨스 소설을 펴냈고, ‘리플리’로 잘 알려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는 가명으로 레즈비언 로맨스물을 썼다.
최근 국내 출판계에서도 필명으로 활동하는 작가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명망 높은 문예지를 통해 문단에 등단하고 유명 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작가가 최순결이라는 필명으로 장편소설 ‘4월의 공기’를 지난 3월 발표했다. 출판계에 만연한 기성 권력에 도전하고 문학적 독립을 위한 순결한 의지를 표현하고자 최순결이라는 필명을 택했다. ‘4월의 공기’를 펴낸 출판사 웅진문학임프린트 곰은 “이름의 무게에 짓눌려서 쓰지 못하던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고자 했다”며 “오로지 한 편의 소설로서 작품을 판단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이정서라는 필명의 번역자는 ‘알베르 카뮈 권위자’로 알려진 김화영 교수 번역의 ‘이방인’을 비판하며 새로운 번역본의 ‘이방인’을 내놨다. “지금까지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고 말한 이정서 번역자는 기존 권력에 도전하기 위해 자신의 이력을 지웠다. ‘이방인’을 펴낸 새움출판사 측은 “본업이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이력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작품 자체로 도전하기 위해 필명을 썼다”며 “필명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작품만으로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