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홍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이 세계 주요 국부펀드, 연기금, 국제금융기구 등 약 5500조원의 돈을 굴리는 30개 기관을 각각의 여건과 선호도에 따라 분류해 투자 로드맵 짜기에 나선다. 전세계 큰손들이 공동투자에 나서도록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것은 물론 앞으로 거액의 투자 흐름을 주도해 나가는 데 안 사장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안 사장은 12일까지 이틀간 서울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세계 28개 연기금·국부펀드가 참여하는 ‘공공펀드 공공투자 협의체’인 크로사프(CROSAPF) 출범식을 개최한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발표했다. 크로사프는 우리나라 국부펀드인 KIC가 주도해 만든 것으로, 세계 최대 국부펀드인 노르웨이투자관리청(NBIM), 일본 공적연금(GPIF)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이 굴리는 자산 규모는 합쳐서 5조3000억달러(약 5490조원)를 넘어선다.
안 사장은 “크로사프 협의체 기관들끼리 투자 정보를 서로 공유하기로 했다”며 “KIC가 이들 기관들의 정보를 다 모아 이해가 맞는 기관들끼리 그루핑(묶는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안 사장, 추진력으로 전세계 큰손들 뜻 모아 = 안 사장은 전세계 큰손들을 서울에 모으기 위해서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했다. 많은 투자 기관들이 크로사프와 같은 협의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행동에 나서진 못했다. 하지만 안 사장이 지난 5월부터 11개 나라에 출장을 다니며 설득 작업에 나서 크로사프가 출범한 것이다. 안 사장은 “투자 규모가 천억달러 이상이 안되는 작은 기관들이 모두 참여한다고 나서자 큰 기관들도 왕따가 될까 두려워 모두 참여하게 됐다”고 그간의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다.
아드리안 라이더 호주 퀸즐랜드투자공사(QIC) 최고투자책임자(CIO)도 “이렇게 큰 규모의 조직에서 협의체를 만들고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은 안 사장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을 비롯해 한국 정부의 환대도 감명 깊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이 공동투자에 열정적인 것은 공공투자가 수익률은 높고 리스크가 낮기 때문이다. 그는 “KIC는 직접·간접·공동 투자 방식으로 투자하는데, 이중 공동투자 수익률이 연 20%대로 가장 높다”며 “또 각 나라를 대표하는 국부펀드·연기금이 공동투자를 하게 되면 서로를 속이기가 어렵기에 믿을 수 있는 상태에서 투자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통일비용 마련도 크로사프를 조직하게 된 배경이다. 안 사장은 “통일 이후 20∼30년간 꾸준히 필요한 자금을 전액 자본시장에서 마련하기는 어려운데다, 세금을 올리면 저항감이 너무 클 것”이라며 “각국 공공펀드의 인프라 공동 투자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크로사프를 통해 공동투자가 활발히 이뤄지도록 발바닥이 뜨겁게 움직일 것”이라며 “국내 투자가 활성화되는 것은 물론 청년실업 해소에도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서울에 모인 국부펀드 CEO, 한국에 투자 의향 나타내 = 실제로 각국의 투자기관의 수장들은 이날 행사에서 한국에 대한 투자 의향을 적극적으로 내비쳤다. 키릴 드미트리 러시아 직접투자펀드(RDIF) 최고경영자는 “한국의 첨단기술과 인프라산업 구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며 “현지 파트너와 함께 한국 투자처를 모색하고 싶다”고 밝혔다.
라이더 최고투자책임자도 “한국 인프라 투자에 관심은 많았는데 경쟁이 치열해서 실제로 투자에 나서진 못했다”며 “연기금·국부펀드들의 협의체 구성을 계기로 한국 내에서 좋은 투자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락시미 벤카타찰람 아시아개발은행(ADB) 부총재는 “2030년까지 아시아에 매년 8000억달러의 투자가 필요하다”며 “ADB가 크로사프와의 협력을 통해 공동 자금조달을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사프 성공의 핵심은 실천 = 이제 첫걸음을 뗀 크로사프는 갈길이 멀다. 안 사장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며 “협의체 구성의 핵심은 실제 실천으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 협의체가 국내 투자 활성화에 기여하려면 국민연금과의 협력도 필수다. 국민연금은 이번 행사에 참석은 했으나 크로사프 구성원으로서 사인은 하지 않았다. 안 사장은 “KIC는 국외 투자만 가능하지만 크로사프를 통한 국내 투자도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도록 해 좋은 투자처가 생기면 국민연금에 제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크로사프 참여 기관들은 매년 두 차례 모임을 열기로 했다. 각 기관 CIO가 중심이 된 실무모임도 구성한다. 이들은 내년 11월 인천에서 다시 모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