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강원도 산골 마을에는 텔레비전이 귀했다. 그래서 ‘말괄량이 삐삐’(원제 삐삐 롱스타킹)가 방영되는 날이면 텔레비전이 있는 집 아이(후배일지라도)에게 잘 보여야 했다. 동네 아이들이 다같이 모여 연속극을 보던 그 시절, 텔레비전은 ‘바보상자’가 아닌 정(精)을 담는 보물상자였다. 1980년 여름 우리집에도 드디어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동네 아이들은 풍선껌, 눈깔사탕 등을 주며 잘 보이려 들었다. 왜냐하면 우리집 건 컬러 텔레비전이었기 때문이다. 삐삐가 신은 짝짝이 스타킹을 구분할 수 있었고 양 갈래로 땋아 쫙 뻗쳐 놓은 머리카락이 빨간색임을 알 수도 있었다. 이후 부모도 없이 얼룩무늬 말 한스, 원숭이만 데리고 커다란 집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삐삐의 강한 모습에 더욱 빠져들었다. 그런데 매력적으로만 보이던 삐삐의 빨강 머리에 사회학적 의미가 담겼을 줄이야! 삐삐를 탄생시킨 스웨덴 출신의 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Astrid Lindgren)이 삐삐의 머리를 빨간색으로 표현한 이유가 여권신장의 상징성 때문이라는 사실을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들으며 처음 알았다.
이쯤에서 질문 하나. 빨강색/빨간색, 파랑색/파란색, 검정색/검은색, 노랑색/노란색 등에서 둘 중 어느 것이 바른 표현일까. 색깔과 관련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 하는 부분이다. 눈과 입에 너무도 익숙한 탓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빨강색’ ‘파랑색’ ‘검정색’ ‘노랑색’ 등은 바른말이 아니다. ‘빨강’은 그 자체가 ‘빨간 빛깔이나 물감’이란 뜻으로, ‘빨간색’의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빨강색’은 ‘빨간색색’이 되는 것이므로 잘못된 표현이다. 이 같은 이유를 들어 국립국어원은 빨간색, 파란색, 검은색, 노란색을 바른말로 규정한다. 물론 ‘-색’을 뺀 빨강, 파랑, 검정, 노랑은 맞는 표현이다. ‘빨강 머리’ ‘빨강 스타킹’ 등으로 활용할 수 있다.
내친김에 색깔과 관련한 낱말을 좀더 살펴보자. 영어 블랙(Black)에 해당하는 우리말은 검다를 비롯해 까맣다, 시커멓다, 거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등 다양하다. 그런데 표현이 풍부한 만큼 ‘거무티티하다’ ‘거무틱틱하다’ 등 잘못 쓰는 말도 있다. 이들 말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아예 머릿속에서 버리자. 시나 노랫말에서 만나는 ‘푸르른’ ‘누르른’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색깔이다. ‘푸르른’과 ‘누르른’이 바른 글꼴이 되려면 ‘푸르르다’와 ‘누르르다’라는 말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말에 이 같은 단어는 없다. 따라서 푸르다와 누르다를 활용할 경우 ‘푸른’과 ‘누른’으로만 써야 한다.
중세인들은 빨간색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지닌 사람은 성적 에너지가 과한 이로 여겼다. 피가 몰린 듯 보인다 하여 심지어 악마로 여기기도 했다. 특히 마녀사냥이 절정에 이른 16~17세기에 빨강 머리카락의 여자들은 마녀로 몰려 죽는 일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깬 대표적 작품이 바로 1945년 출간된 ‘삐삐 롱스타킹’이다. 삐삐의 빨강 머리는 더 이상 마녀가 아닌 독립적이고 당당한 여성의 상징이 됐다. 올봄엔 빨강 머리가 유행인가 보다. 바람에 휘날리는 빨간색 머리카락이 매혹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