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상대로 한 ‘기획소송’이 늘고 있다. 과거에는 손해를 본 당사자들이 직접 변호사를 찾아 나서야 소송이 진행됐지만, 법조계에 불황의 그늘이 드리우면서 이제는 변호사들이 먼저 나서 소송 참가자들을 모집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변호사들이 직접 다수의 참가자를 찾아 나서는 기획소송은 소액주주처럼 흩어져 있을 때 권리구제가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측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뒤집어보면 기업이 예전보다 법적 리스크 관리를 강화할 필요성도 커진 셈이 된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과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건에 대해 소송이 제기된 것은 이러한 기획소송의 대표적 사례로 관심을 끌고 있다.
법무법인 한누리는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대우조선해양 주식을 매수한 소액주주들을 대상으로 소송 참가자를 모집해왔다. 이렇게 모인 소액주주 119명은 지난 1일 분식 회계 책임을 묻기 위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한누리 측은 투자자들을 대리해 회사의 분식회계 책임이나 증권 관련 불법행위 책임을 묻는 데 특화된 로펌으로 알려져 있다. 한누리는 현재 삼성자산운용 소수주식 강제매수 청구사건, CJ사모특별자산 투자신탁 1호 펀드 손해배상 청구소송, 디지텍시스템즈 분색회계 소송도 진행 중이다.
최근에는 세이프에셋 불완전 판매에 따른 책임을 묻는 소송을 진행해 1심에서 40%의 배상판결을 받았고 현재 항소심 대리하고 있다. 또 대동전자의 해외 현지법인 지분을 대주주 특수관계인에게 헐값으로 매각한 데 따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맡아 1심에서 114억원 승소 판결을 받았다.
기획소송은 과거 액수가 작아 소송을 내지 못했던 일상생활에 관련된 사건에서 특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줄소송을 예고한 폭스바겐 단체소송은 1차에서 2명이 소송을 낸 뒤 2차에서 38명, 3차에서 266명이 소장을 접수한 상태다.
소송을 기획한 법무법인 바른은 13일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적용되는 미국에서도 소송을 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소송인단이 증가하면서 청구액도 그만큼 증가해 기업 입장에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이지만, 개인당 청구금액은 5000만~1억원 안팎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밖에 지난 5월 가짜 논란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백수오 사건을 비롯해 가정용 전기요금에만 적용되는 누진제의 부당성을 주장하는 누진제 사건, 분양 당시 허위과장 광고로 손해를 배상하라는 인천 영종도 하늘도시 사기분양 사건 등도 생활에 밀접한 분쟁이 법정으로 가게 된 기획소송의 좋은 예다.
기획소송은 소송에 참여하는 당사자 수가 많기 때문에 개별 부담 비용은 저렴한 편이다. 하지만 변호사들이 승소 가능성이 낮은 데도 착수금을 노리고 소송을 부추겨 소를 남용할 우려도 존재한다. 한 대형로펌은 소송인단을 모집한 뒤 한 주 간격으로 소장을 접수하면서 기자회견을 하는 등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을 지낸 최진녕 변호사는 “기획소송의 특성상 대형 로펌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차원에서 소송을 기획하기보다는 변호사단체가 공익 소송단을 꾸려서 시장에 유의미한 메시지를 보내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기획소송을 통해 소송 당사자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은 크지 않다. 하지만 소송을 계기로 상대 기업과 업계의 부당한 관행을 개선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민사사건을 전담하는 한 부장판사는 “재판을 받기 위해 법원을 찾는 소비자들을 막을 근거는 없지만, 사실 폭스바겐 같은 사건에서는 조기 권리 구제 등을 위해서라도 리콜 등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게 최선의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