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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는 ‘낮술은’에서 “낮술은 취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술이 센가 본다. 그러나 낮술은 강력하다. “낮술을 마시면 애미 애비도 몰라본다”는 말이 있지만, 낮술은 주기가 빨리 오르고 취기가 강렬하다. 알 수 없는 호기도 생긴다.
낮술은 쉽게 분해되지 않고 코끝에 걸린다. 정현종의 시 ‘낮술’은 “밤에는 깊은 꿈을 꾸고/낮에는 빨리 취하는 낮술을 마시리라/그대, 취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못하는 시간이여”라고 끝난다.
김상배의 ‘낮술’은 “이러면 안 되는데”, 겨우 일곱 자로 돼 있다. 내가 아는 가장 짧은 시다. 그렇다. 낮술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마시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취한다. 원래 낮은 일하는 시간이기 때문일까. 낮술에 취하면 민망하고 부끄럽다.
하지만 낮술을 마시면 알 수 없는 감각이 계발된다. 평소 생각하지 못한 말이 떠오른다. 김영승의 ‘반성·16’이라는 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술에 취하여/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놓았다./술이 깨니까/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다시는 술 마시지 말자고 씌어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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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인이 아니지만 낮술을 마시고 뭔가 끼적거린 경우가 많다. 급하게 휘갈겨 써서 글씨를 알아볼 수 없거나 알아보더라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게 많다. “방귀의 방향”, 이게 무슨 말이지? 方向인가 芳香인가? ‘자신과 겨루고 남들과 나눈다’, 이 거룩한 말씀은 내 생각인가, 남의 말인가? “남이 깨면 프라이, 내가 깨면 병아리”, 이 해괴한 문자는 내 발상인가 어디서 베껴온 건가?
봄이 되면 낮술 마시기가 더 그럴듯해진다. “볕이 점점 좋아진다. 낮술이 당기는 계절. 햇살을 만끽하며 낮술 하기 좋은 곳…” 이렇게 글을 쓴 사람도 있다. “당신의 낮술을 책임질 새로운 멕시칸 레스토랑”, 이런 광고도 보았다.
회사 근처에 ‘낮술 환영’이라고 써놓은 치킨집이 있다. 그 밑에는 “낮부터 술을 하시면 경제 발전과 집에 일찍 들어가는 두 가지 효과를 보실 수 있습니다”라는 말을 당당하게 써놓았다. 그런가? 경제 발전은 그렇다 치고, 집에 일찍 들어가게 되던가? 오히려 거의 밤까지 술을 내처 마셔 귀가가 더 늦어지곤 하던데.
낮술을 하면서 최근 세상을 버린 선배를 생각한다. 낮술을 즐기던 그는 나하고도 더러 마셨지만, 나 말고 지금부터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배와 대낮에 2~3차를 가곤 했었다. 지난해 12월에 숨진 다른 선배의 추도사를 쓰기도 했는데, 글을 쓴 회보가 발행되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숨진 이가 숨진 이를 추도한 셈이 됐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낮술을 다시 마신다. 뭔가 새로운 말이 떠오르기를 기대하면서. 그도 지금 하늘에서 낮술을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