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유혜풍(유득공)은 박식하고 시를 잘 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를 지어 우리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를 지어 발해의 인물, 군현, 왕의 계보, 연혁을 자세히 엮어 종합해 놓았으니,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한 것이다.” -1785년 박제가가 쓴 ‘발해고’ 서문 중에서
조선 정조 때의 선비 유득공(柳得恭, 1748. 12.24~1807. 10.1)은 유춘과 남양 홍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지만 증조부 유삼익과 외조부 홍이석이 서자 출신이었던 탓에 신분상 서자로 살아야 했다.
시문과 글짓기,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정조의 인정을 받은 그는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규장각 검서관으로 임명돼 박제가, 이덕무, 서이수와 함께 ‘규장각 4검서(檢書)’로 불렸다. 신라와 발해가 병존했던 시기를 남북국시대로 규정한 그는 “고려시대 역사가들이 통일신라를 남조로, 발해를 북조로 하는 국사체계를 세우지 않았던 것이 영원히 옛 땅을 되찾는 명분을 잃게 됐다”며 발해를 본격적으로 연구해 조선역사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발해고’와 ‘사군지’ 등을 출간했으며 이러한 연구는 정약용의 ‘아방강역고’와 한치윤의 ‘해동역사’의 토대가 됐다.
그는 북학파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백탑동인(白塔同人)’이라는 시동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한시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와 더불어 ‘한학사가(漢學四家)’로도 불렸다.
풍천부사로 부임하던 무렵 그를 아끼던 정조가 사망하자 그는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은거하면서 개성·평양·공주 등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했고 저술에 몰두하다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