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기차 위축에 성장속도 둔화
가격·제품 경쟁력 갖춘 中 독주 굳혀
“지역 맞춤·차세대 기술 혁신 필요”
한국 경제를 이끌 ‘제2의 반도체’로 주목받는 배터리 산업의 위상도 예전같지 않다. 공격적인 해외 진출을 통해 현지 생산 체계를 구축한 우리 배터리 기업들은 한때 수주잔고 1000조 원을 돌파하는 성과를 이뤄냈지만, 과도한 투자가 되레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배터리 수요 대부분을 차지한 전기차 시장의 위축이 직격타가 됐다. 혁신 기술이나 제품이 대중화하기 전 수요가 잠시 정체되는 시기를 ‘캐즘(Chasm)’이라고 한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은 ‘캐즘의 계곡’을 지나고 있다.
다만 전기차 시장의 성장 자체가 멈춘 건 아니다. 급격한 성장세를 보였던 수년 전과 비교하면 속도가 둔화했을 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글로벌 전기차 시장은 여전히 20% 내외 성장률을 이어가는 중이다. 중장기적 성장성에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중국과의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술력이 앞섰던 우리 기업들은 초기 저가로 밀어붙히는 중국 기업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기업이 가격뿐만 아니라 제품 경쟁력까지 갖추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제 중국 배터리 업체들은 ‘안방 호랑이’를 넘어 전 세계를 호령하며 독주 체제를 굳힌 상태다.
19일 에너지 전문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의 합산 점유율은 14%에 그쳤다. 1년 전과 비교하면 10%포인트(p) 하락한 수준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9%로 3위였고 △삼성SDI 3% 8위 △SK온 2% 9위 였다.
반면 중국 닝더스다이(CATL)는 전기차·ESS 배터리 시장에서 41%를 점유하며 독보적 1위에 올랐고, 비야디(BYD)는 15%로 뒤를 이었다. 두 회사를 비롯해 중촹신항(CALB), 이브(EVE), 궈시안(고션 하이테크) 등 중국 업체들이 모두 상위 10위권에 포진했다.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의 장악력이 커진 배경으로는 리튬인산철(LFP) 배터리의 빠른 확산이 꼽힌다. LFP 배터리는 비싼 니켈이나 코발트가 들어가지 않아 가격이 저렴하고, 열 안정성이 뛰어나 ESS뿐만 아니라 전기차 시장에서도 수요가 늘고 있다. 특히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캐즘의 돌파구로 중저가 보급형 모델에 주목하면서 LFP 채택 비중은 빠르게 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성능 중심의 삼원계 배터리에 집중해 왔기 때문에 완성차 업체의 이 같은 전략 수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들도 뒤늦게 LFP 배터리 개발을 시작했으나 아직 양산 초기인 만큼 당분간 중국의 독주 체제가 지속될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한국은 기술을 고도화해 기존 LFP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나 저온 성능 등을 개선한 제품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강점을 가진 기술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의도다.
배터리 업계가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캐즘 돌파구로 여겨지는 ESS, 도심항공교통(UAM) 등은 아직 개화 단계이고, 전기차 시장을 둘러싼 정책 환경도 비우호적이어서다.
북미 시장은 탈중국 공급망 구축 정책으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수혜를 받는 지역이었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직후 전기차 의무화 정책을 폐기한다고 공언하면서 불확실성이 커졌다. 북미 투자를 가속한 요인이었던 인플레이션감축법(IRA)도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최재호 나이스신용평가 실장은 “전기차 산업은 환경 규제와 보조금 두 개의 동력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는데 규제가 완화되고 보조금이 축소된다면 완성차 업체들은 전동화 전략을 기존 계획보다 지연시킬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기차 역성장 국면에 들어선 유럽의 상황은 더 나쁘다. 유럽연합(EU)은 최근 자동차 탄소 배출 규제를 3년간 유예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유럽은 국내 기업들의 ‘텃밭’으로 여겨졌으나, 최근 중국 기업들의 진출이 적극적이다. 독일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는 CATL은 하반기 헝가리 공장을 가동할 계획이고, 스페인에서는 스텔란티스와 합작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BYD도 헝가리와 터키 공장을 차례로 가동할 예정이다.
배터리 업계는 생존에 방점을 두면서도 ‘기술력’을 지속 확보해 캐즘 이후 도래할 ‘슈퍼 사이클’을 대비하겠다는 전략이다.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대체해 화재 위험을 대폭 낮춘 ‘꿈의 배터리’ 전고체 배터리와 46시리즈(지름 46㎜) 원통형 배터리 등의 개발은 활발한 상태다. 배터리 3사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매년 증가 추세로, 지난해 3사의 R&D비용은 2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SNE리서치는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생산량 확대를 넘어 지역별 맞춤형 전략과 차세대 기술 혁신이 필수적”이라며 “지속 가능한 공급망 구축과 완성차 업체와의 긴밀한 협력이 장기적인 경쟁력 확보의 핵심 요소로 작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