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증권시장에선 하루에도 수백에서 수천억원씩 주식거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업이 발행한 유가증권이나 국가가 발행한 채권 등이 거래되는 곳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주식을 시작하기도 합니다. 우리 생활 깊숙히 들어온 증권시장이지만 그 역사는 100년 남짓됐을 뿐입니다.
유가증권은 1897년 한성은행 설립과 동시에 발행되기 시작했으나 실제 증권시장이 들어선 것은 1912년. 당시 주식판매상들이‘유가증권 현물문옥(問屋)조합’을 설립하면서 부터입니다. 이때부터 전장과 후장이 개설됐으며 시세표도 만들어졌으니깐 우리나라 증권시장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곳에선 하루 평균 2000~3000주가 거래돼 비교적 활발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오늘날 주식시장에 투기성 거래가 심하 듯 당시에도 투기 거래로 인한 결제불이행 사태로 발생하면서 아쉽게 해산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제2의 유가증권 현물조합이 재결성됐지만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공식 허가된‘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주식회사 형태로 설립되면서 다시 해산됐습니다.
사실 증권시장 설치운동이 1910년부터 활발했지만 당시 식민지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했던 일본은 민족자본의 성장을 우려해 증권시장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장 규모가 급속히 커지고 일본의 정책이 바뀌면서‘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이 출범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후 관련 법령이 만들어지면서 1932년에는‘조선취인소’,1943년에는‘조선증권취인소’로 이름을 바뀌었습니다.
경성주식현물취인시장 출범에는 한국인 9명을 포함해 26명이 발기인으로 참가했으며 그해 4월 주식 현물시장 조항(4호시장)을 신설했습니다. 일본의 인기주와 국내회사 30여개 종목을 대상으로 그해 8월14일부터 역사적인 첫 거래를 시작했습니다. 이때 자본금은 30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개장 당일은 오전에만 장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27개사 37종목에서 거래량이 3040주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실물경기가 위축되고 있을 때여서 증권시장은 곧 침체기로 돌아서게 됩니다. 실제로 당시 거래량이 급감해 9월의 일평균 거래량이 1100주에 불과했으며 하루 입장객도 20~30명으로 개장 초기에 비해 10분의 1로 대폭 줄었습니다.
특히 11월까지 거래종목은 59개로 늘어났지만 개장이후 이때까지 누적 1000주 이상 대량 거래 종목은 7개에 불과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