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의 여성들이 골프채를 잡고 꿈을 쫓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 여성 프로골퍼의 수상 소감엔 벅찬 감동이 녹아있었다. 지난 2013년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박인비(27ㆍKB금융그룹)다. 당시 박인비는 메이저 대회 3연승 포함 한 시즌 6승을 휩쓸며 올해의 선수가 됐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의 개척자 박세리(38ㆍ하나금융그룹)도 이
‘오렌지군단’ 네덜란드의 파상 공격이 이어졌다. 한국 축구 대표팀은 걷어내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필사적인 방어에도 한계가 있었다. 실점 또 실점. 스코어보드엔 0-5란 숫자가 선명했다. 더 이상의 실점 없이 경기가 끝나기만을 바랬다.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한국과 네덜란드의 경기 장면이다. 당시 한국 대표팀 감
“그동안 챔피언벨트를 잘 지켜줘서 고맙다.” 선한 미소를 띤 청년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엔 독기가 서려 있었다. 분노였다. 그의 보이지 않는 분노가 기자회견장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1992년 11월 일본 오사카 부립경기장에서 열린 세계권투협회(WBA) 주니어플라이급(-49㎏) 챔피언 이오카 히로키(일본)의 2차 방어전에 앞선 기자회견장 풍경이다. 도
2006년 토리노동계올림픽에서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으로 이어지는 8년은 한국 빙상 역사에 슬픈 역사로 남아 있다. 곪아터진 내부 부조리가 세간에 추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 안타까운 역사엔 안현수, 아니 빅토르 안이라는 이름이 깊게 패여 있다.
2006년 2월 이탈리아 토리노에서는 제20회 동계올림픽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스물한 살 청년
캐나다 밴쿠버 부근의 리치먼드 올림픽 오벌은 한국 스포츠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장소다. 빙속 변방 코리아에 질주 본능을 깨운 역사적 장소다. 그 중심엔 ‘빙속 여제’ 이상화(26)가 있었다.
2010 밴쿠버올림픽은 한국 빙속을 위한 대회였다.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한 모태범(26)에 이어 이상화가 여자 500m에서 거짓말
한국 마라톤엔 한때 숙명의 라이벌이 있었다. 이들의 목표는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1970년생 동갑내기인 둘은 친한 친구였지만 서로를 넘어야 했다. 1990년대 한국 마라톤 중흥을 이끈 황영조와 이봉주(이상 45)다.
하지만 두 사람의 라이벌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은 둘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의 기적을
“여왕이 돌아왔습니다. 김연아가 돌아왔습니다!” 배기완 캐스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연아(24)의 마지막 스핀이 마무리되는 순간 캐스터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율이 되어 온몸을 휘감았다.
지난 2012년 3월의 일이다.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이후 2년여 만에 복귀한 김연아는 다시 한 번 국민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당시 TV 중계를 맡은 SBS 배기완
1991년 한국 야구판엔 엇갈린 운명을 타고난 두 남자가 있었다.
A는 당대 최고의 투수로 패배란 걸 몰랐다. 1986년 0.99, 1987년 0.89라는 전대미문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해태왕조’의 선봉에 선 선동열이다. 선동열은 그해 19승 4패, 평균자책점 1.55를 기록하며 다승ㆍ탈삼진ㆍ평균자책점 부문 타이틀을 휩쓸었다. 해태는 선동열이라는 특
한국 스포츠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명장면이 있다. 수많은 명장면 속에서도 유난히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사건은 박세리의 ‘맨발 투혼’이 아닐까. 1998년 7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메이저 대회 US여자오픈에서 연장 혈투 끝에 드라마틱한 우승을 차지한 박세리(37ㆍKDB산은금융)가 주인공이다.
한편의 드라마였다. 당시 박세리의 우승은 국제통화
타율 0.412(1982년 백인천), 시즌 30승(1983년 장명부), 평균자책점 0.78(1993년 선동열). 한국야구가 추억하는 불멸의 기록들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박철순(58ㆍ당시 OB 베어스)의 시즌 22연승이다.
박철순은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24승 4패(승률 0.857) 7세이브 1.84의 평균자책점을 남겼다. 국내 프로야구
1999년 여름, 일본 도쿄돔이 웅성거렸다. 주니치 드래건스와 홈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상식적이지 않은 플레이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는 중견수 앞 평범한 안타를 친 후 아무렇지 않게 2루까지 돌진했다. 그의 무모한 플레이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하아! 다메(안돼)!” 경기장은 웅성거렸다. 그러나 그는 공보다 빨랐다. “세이프!” 2루심의 세이
“내년에는 40홈런을 치겠습니다!” 수수한 눈웃음 때문일까. 그의 말에는 신뢰감이 묻어났다. 티 없이 맑았던 그의 얼굴엔 거짓이란 없어 보였다. 1991년 골든글러브 시상식장에 선 장종훈(당시 24세ㆍ빙그레 이글스)이다.
그해 35개의 홈런을 쳐내며 2년 연속 홈런왕에 오른 장종훈은 기자들 앞에서 ‘다음 시즌 목표는 40홈런’이라고 말했다. 한국 야구사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직장인들이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복싱체육관이다.
“퍽! 퍽! 퍽! 툭! 툭!” 경쾌한 샌드백 타격 음이 짙어가는 도시의 밤에 활약을 불어넣는다. 체육관 유리벽 넘어 낯익은 얼굴의 중년 신사가 손수 복싱을 지도하고 있다. ‘4전5기 신화’ 홍수환(64)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올림픽 폐막식을 앞둔 몬주익 스타디움은 8만여 관중으로 술렁였다. 마지막 올림픽 챔피언을 맞이하기 위해서다. 주인공은 동양에서 온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청년은 코너트랙을 돌아 결승선을 향해 질주했다. 그리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 포효했다. 56년 묵은 응어리가 씻겨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1992년 8월 9일(이하 현지시간)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 직전
박지성(33)은 ‘히딩크의 황태자’였을까. 밑도 끝도 없는 물음에 이끌려 1990년대 초반을 회상해본다.
박지성에게 히딩크는 분명 ‘구세주’였다. 히딩크를 만나면서 비주류에서 주류가 됐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박지성은 월드컵 후에도 히딩크를 따라 네덜란드로 떠나 유럽 진출 꿈을 이뤘다. 과연 히딩크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그
여자프로골프 대회장이 술렁였다. 연장 두 번째 홀에서 김하늘(26ㆍ비씨카드)의 티샷 볼이 숲 깊숙한 곳에 박혔기 때문이다. OB(아웃오브바운드)다. 20홀의 팽팽했던 긴장감은 거기까지였다. 승리의 여신은 김하늘을 외면하는 듯했다.
지난 25일 끝난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 풍경이다. 김하늘은 결승 진출 문턱에서 허윤경(24
서울 영등포구 경인로엔 오래된 상가 건물이 많다. 그중에서도 더 낡고 허름해 보이는 건물이 있다. 건물 안 낡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샌드백 두드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복싱 체육관이다.
평일 저녁 7시. 체육관이 한창 붐벼야 할 시간이지만 젊은 남성 한두 명만이 샌드백을 두드리며 땀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불과 10여년 사이 인기종목에서 극심한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