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대관령을 내가 마지막으로 걸어 넘은 것은 올 봄, 전국의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였다. 또 그러기 전엔 20년 전 지금은 서른두 살이나 된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봄의 일이었다. 그때 대관령 정상에서부터 그 아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시는 시골집까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걸어 내려갔다. 나중에 그렇게 해서 나온 책이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었으며, 이 책은 지금 초등학교 교과서뿐 아니라 몇 종류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도 같이 실려 있다.
책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때 아들과 함께 걸으면서 우리는 우선 우리가 걷고 있는 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라에도 역사가 있고, 집안에도 역사가 있듯이 오래된 길에도 역사가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아이가 우리 할아버지는 무얼 하셨어요? 그 위에 증조할아버지는 무얼 하셨어요? 하고 묻는 대로 집안의 역사에 대해 말했다.
그날 아이는 그런 대화를 통해 가족이라는 틀이 이제까지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더 넓고 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지 한 지붕 아래에서, 또 한 아파트 공간 안에서 잠자고 밥 먹는 몇 사람의 구성원만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가족은 오랜 시간을 두고 함께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대관령길만 해도 예전에 자동차가 없던 시절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할아버지가 걷고, 또 그날 아이와 내가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다들 가족이 중요하다는 건, 또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간에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한 이불을 덮고 사는 부부간에도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고, 아이들과 부모 사이에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또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알아도, 우선은 한 집안의 가장인 우리나라 아버지들이 너무 바쁘다. 노는 데 바쁜 게 아니라 먹고사는 일로 바쁘다.
대화가 부족하다면 그 부족한 대화를 집안에서 마치 탁구공을 치고받듯이 툭툭 한 마디씩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고 한번 이 좋은 가을철 밖으로 나가 길 위에서 대화를 나누어 보시라. 가족은 서로 힘을 보태며 또 서로의 인생의 먼 길을 함께 걷는 사람이다. 꼭 멀리 여행을 가지 않더라도 주변 산책로에서라도 가족과 함께 길 위에서 나누는 대화만큼 정다운 대화가 어디 있겠는가. 아이들과 나누는 부모 자식 간의 대화도 집에서 특별한 형식을 갖추면 대화가 잘 진행되지 않는다. 부부간의 대화 역시 그렇다. 하루만 시간을 내도 자연과 인생과 집안의 모든 얘기를 나눈다.
가족이 함께 있는 시간이 부족해서만 서먹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게 아니다. 함께 있어도 가족 간에 대화가 없을 때 소외감은 가랑비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적셔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게 한다. 정말 걷기 좋은 가을이 왔다. 집 주변의 오솔길 같은 산책로가 우리를 부르지 않는가. 잠시 후면 단풍까지 물든다. 무슨 대화를 나눌까 걱정하지 마라. 길 위에 나서면 막혀 있던 말문도 저절로 터지고 없던 대화거리도 저절로 생겨난다. 우리 걸음이 이야기를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