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출시하면서 본격화된 ‘디지털 혁명’은 미국의 독무대나 다름없었다.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아마존 등 디지털 신대륙을 선점한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전 세계 플랫폼 시장을 휩쓸었다. 가만히 있어도 쌓이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새로운 비즈니스가 끝없이 창출됐고, 거대한 부를 쓸어 담았다.
2022년 ‘챗GPT’ 등장으로 또 한 번 각축전이 시작됐다. 생성형AI를 장착한 디지털 경제는 ‘퀀텀점프’를 예고했다. 자고 일어나면 무섭게 똑똑해진 괴물 AI가 등장하고, 그 AI를 적용한 서비스가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다. 세상은 지금, AI 신대륙을 향해 돌진 중이다.
한국도 경쟁력은 있다. AI시대 석유라 불리는 데이터와 반도체 주권을 모두 확보한 몇 안 되는 국가다. 미국·중국·한국만 독자적 플랫폼을 보유하고 있고, AI 전용 칩 개발에 필수적인 5나노 이하 미세공정이 가능한 나라도 한국과 대만뿐이다.
미래먹거리에 목마른 지자체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서울시는 AI 연구·개발 거점을 구축하고 인재 육성, 스타트업 창업 지원, 투자 유치에 나섰다. 그러나, 미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신기술을 접목한 신산업의 출현을 막는 ‘혁신의 적(敵)’들이 견고해서다.
우선 원칙적 금지에 기반한 ‘법’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 AI를 활용한 모든 서비스가 사살상 불법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규제정보포털에 따르면 AI로 반려동물 건강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서비스는 수의사법에 저촉된다. 교차로에 설치된 AI카메라로 각 차선의 차량대수를 파악해 신호주기를 자동으로 생성, 교통흐름을 개선하는 서비스는 도로교통법에 걸리고, 배달 로봇과 자동차로 취득한 영상정보 원본을 활용해 자율주행 기술을 고도화하는 서비스도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힌다. 숨통을 틔워주는 규제샌드박스 제도가 있지만, 법 개정이란 본래 취지는 퇴색된 지 오래다.
법 개정의 키를 쥔 ‘정치’는 ‘AI 쇄국’의 선봉장에 서 있다. 의사 대면 진료만 허용한 의료법은 1989년 제정된 후 35년째 요지부동이다. 그 결과 첨단 헬스케어 산업은 혁신을 멈췄다. “엄청난 의료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고, 세계 최고 웨어러블 디바이스 제조기술을 가진 한국만큼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을 잘 키울 수 있는 나라가 없는데 왜 황금시장에 도전하지 않느냐”는 미국 바이오 메디컬 엔지니어링 분야 최고 권위자의 말은 뼈아프게 들린다. 세계 교통혁신을 주도한 우버 서비스가 출시된 지 14년이 지나도록 한국에선 불법인 배경에도 1961년 제정된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 있다.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반도체 특별법은 R&D 인력 중 희망자에 한해 한시적으로 주 52시간제를 완화해 달라는 업계 호소를 더불어민주당이 외면하면서 연내 통과가 무산됐다.
정치가 이토록 고인물이 된 건 ‘이익집단’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모든 게 디지털로 이동한 시대, 변화 거부는 기존 시스템에서 이득을 보고 있는 집단의 밥그릇 지키기일 뿐이다.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장치도 필요하지만, 분초를 다투는 속도전에서 다음은 없다. 혁신의 닻을 올리고 신대륙을 개척한 미국과 규제에만 열을 올린 유럽의 처지를 비교하면 미래가 보인다. AI 신대륙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고, 한국의 미래가 아닌 특정 집단 이익만 대변하는 정치는 물갈이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