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기업 보호 위해 의무화 폐지
“의무화땐 파벌싸움 등 경쟁력 상실”
상법 개정으로 집중투표제가 의무화되면 1950∼60년대 일본 기업들이 겪었던 시행착오가 재연될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4일 한국경제인협회는 권용수 건국대 교수에게 의뢰한 ‘일본 회사법상 집중투표제 도입 및 폐지에 관한 법리적 검토’ 연구용역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한국은 그동안 집중투표제 채택 여부를 주주들의 선택에 맡기고 있는데, 최근 자산 2조 원 이상 상장회사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하는 상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됐다. 반면 일본은 1950년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가 기업 경영 저해, 경영권 위협 논란 등으로 1974년에 상법을 개정해 의무화를 폐지했다.
일본은 1950년 기업 자금조달의 편익과 경영진의 신속한 의사결정을 위해 미국식 이사회 제도를 도입하고 이사 권한을 강화했다. 그러나 주주총회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하고, 소수주주 이익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를 고려해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했다. 이와 관련 집중투표제 청구요건을 단독주주권(1주만으로 청구 가능)으로 규정하고, 정관으로 집중투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집중투표제 도입 이후 이사회 내부 대립으로 인한 원활한 경영 저해, 노동조합 운동의 이사회에 영향, 미군정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도입된 제도 등을 이유로 집중투표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외자에 관한 법률’의 개정 필요성이 높아졌던 것도 집중투표제를 폐지하게 된 주요 배경이다.
당시 외국인은 일본 국내기업의 지분을 최대 25%까지만 보유할 수 있었는데, 만일 ‘외자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외국인 투자 제한이 없어지고, 의무적 집중투표제가 유지된다면 외국 자본으로부터 일본 기업의 경영권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즉 자국 기업의 경영권 방어가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한 주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권 교수는 우리나라가 상법을 개정해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한다면, 과거 일본 기업들이 겪었던 경영권 위협이 한국에서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사 선임 과정 등 특정주주간 파벌 싸움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권 교수는 “주주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사를 선출해야 할 유인이 크고, 선출된 이사 역시 회사 발전보다 자신을 선임해준 특정주주들의 편을 들어 주는 것이 연임 전략에 유리하다”며 “이 과정에서 자격 미달의 이사가 선임되거나 주주 간 파벌 싸움 과정에서 기업 정보가 외부로 유출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
자본 다수결 원칙이라는 주식회사 기본원칙이 훼손되고 기업가 정신도 위축된다. 자본 기여도가 낮은 특정주주가 집중투표제를 통해 회사 경영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반면, 회사에 대규모 자금을 낸 대주주는 오히려 영향력이 축소되기 때문이다. 결국, 대규모 자금 투자를 통한 기업경영의 유인이 사라지게 되면서 투자자의 외면을 초래할 수 있다.
회사 핵심기관인 이사회가 이익집단 간 이해충돌의 장(場)으로 변질하면서, 의사결정이 지연되고 기업 운영의 효율성을 잃는 부작용도 발생한다. 이사회의 본래 기능은 회사의 주요 업무 집행사항을 의결하고 경영자의 업무집행을 감독하는 것인데,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이사회 운영이 파행을 겪을 가능성도 있다.
권 교수는 “일본 사례를 보면 집중투표제가 회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특정 소수파의 이익만을 반영하기 위한 것인지 의문이 있다”며 “집중투표의 부작용 해소 방안 없이 무턱대고 집중투표를 의무화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큰 만큼 입법 논의를 지양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