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인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은 독일인들이 나치즘의 노예가 된 원인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했다. 프롬에 따르면, 중세유럽에서 개인의 역할은 신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됐다. 개인은 자유를 박탈당하고 소속감과 안정감을 가졌다. 이후 개인주의, 종교개혁, 자본주의 흐름에서 공동체가 해체되고 자본 계급체계가 만들어졌다. 노동자는 사회 구성원이 아닌 생산 도구로 여겨졌다. 자유는 허울이었다. 이들은 패배주의에 빠졌다. 제국주의 영광은 잠시였다.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패배주의는 사회 전반에 번졌다. 이런 혼란기에 탄생한 나치즘은 소속감과 안정감, 역할을 갈구하던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나치의 주요 지지기반은 청년층이었다.
때로는 청년세대의 패배주의가 정반대의 결과를 만든다. 2010년 전후 일본에 사토리(さとり) 세대가 등장했다. 우리 말로 달관 세대다. 1990년대 태어나 ‘잃어버린 30년’에 갇힌 일본의 청년들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겪어보지 못했다. 장기 저성장의 원흉인 기성세대는 여전히 기득권을 장악하며, 청년세대의 정치·사회 참여를 막았다. 희망을 잃고 무력해진 일본 청년들은 가장 소극적 방식으로 저항했다. 취업과 소비,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며 사회의 부품이 되길 거부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두 현상이 동시에 나타난다. 한쪽에선 청년층이 극우세력에 동조하고, 다른 한쪽에선 취업·훈련·교육을 포기한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이 는다.
청년층 극우 동조는 남성에게서 두드러진다.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에 앞장섰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목소리를 키운다. 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병역의무만 짊어진 채 ‘남성 권력’을 상실했는데도 50·60대 가부장들의 업보로 양보를 강요받고, 이에 반발하면 ‘도태남’이라 조롱받은 현실에 대한 반발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제도권 정치인들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여성 지지자들을 일컫는 개딸(개혁의 딸)만큼 20·30대 남성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오히려 자칭 지식인들이 나서서 젊은 남성들을 훈계하고, 가르친다. 이런 상황에서 극우세력은 20·30대 남성들에게 역할과 소속감, 애국자란 자긍심을 줬다. 이들에게 동조하는 건 정치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니트족 증가의 배경은 사회·경제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의 상당수가 비정규직·간접고용 일자리로 대체됐다. 한정된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를 차지하려면 명문대 졸업장이 필수가 됐다. 어릴 때부터 경쟁이 강요됐다. 왜곡된 입시는 학군을 만들었다. 그 결과로 수도권 쏠림이 심화하고 서울 집값이 폭등했다. 배운 것이라고는 경쟁뿐인 청년들은 배운 것과 다른 사회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여기에는 남녀가 없다. 니트족이 포함된 ‘쉬었음’ 규모는 남자가 크지만, 증가율은 여자가 높다.
두 현상은 주체도, 양태도 다르다. 본질은 유사하다. 일종의 사회적 질병이다. 윗세대로는 번지지 않겠지만, 놔두면 아랫세대로 번진다. ‘극우 유튜브에 뇌가 절여졌다’, ‘아직 배가 덜 고프다’ 같은 조롱성 진단은 문제를 키운다. 가장 시급한 건 정치권의 각성이다. 이대남, 이대녀 갈라치기 그만하고, 그들의 이야기부터 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