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통상임금, ‘책상머리 판결’ 안된다

입력 2025-02-04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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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설 한국좋은일자리연구소장ㆍ일자리연대 집행위원장

대법원, 기존요건인 ‘고정성’ 폐기
법리만따져 임금체계 왜곡 우려돼
자율성 높여야 노사문화 건강해져

지난해 1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1년 만에 통상임금 기준을 뒤엎는 판결을 내놓자 기업들 사이에서 “이제와 기준을 바꾸면 어떡하냐”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왔다. 근로기준법 내용이나 노사 간 역학관계에 변한 게 없는데 대법원 전합 판결을 또다시 변경한 데 대한 불만이다. 2013년 대법원 전합 판결에 따라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빼고, 이를 전제로 취업 규칙을 만들고 노조와 단체협약을 맺어 왔던 기업들로서는 대법원으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대법원은 한화생명보험과 현대자동차 전·현직 근로자가 회사를 상대로 낸 임금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대법원장과 12명의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존 통상임금의 고정성 요건을 폐기했다. 대법원은 “종전 통상임금 판단 기준인 고정성을 통상임금 요건으로 볼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통상임금은 ‘소정근로의 대가로 지급되는 금품이어서 정기적·일률적으로 지급된 것’이면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11년 만에 통상임금 요건을 바꾼 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친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리나라 노사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법리만을 따진 ‘책상머리 판결’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현행법에 명시하지 않은 고정성 요구는 통상임금 범위를 부당하게 축소하려는 것”이라는 대법원의 지적도 노사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로 해석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나라의 많은 노동조합들은 매년 고율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극렬파업을 벌였고 생산차질을 우려한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지불능력 이상의 임금을 인상해 주었다. 통상임금에 포함되는 기본급은 물론 통상임금에 포함되지 않는 각종 수당, 상여금 가리지 않고 퍼주었다. 고공농성 분신자살 화염병 쇠파이프 등을 동원한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판을 치는 한국의 노동현장에서 기업들의 선택지는 돈으로 때우는 것 외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노조들은 2013년 통상임금 판결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던 초기만 해도 회사 측을 상대로 통상임금 관련 소송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임금협상 때 자신들이 한 약속과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95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임금이분설을 폐기한 판결은 노사관계 현실을 반영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임금이분설은 임금을 근로의 대가로 주는 ‘교환적 부분’과 최소한의 생계유지를 위해 지불하는 ‘생활보장적 부분’(교통수당, 정근수당, 가족수당 등) 두 가지로 나뉜다는 학설이다. 노조가 파업을 벌일 경우 근로를 제공하지 않았기에 ‘무노동무임금’ 원칙에 따라 교환적 임금은 지급할 필요가 없지만 생활보장적 임금은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 학설을 따른 대법원 판결도 있었다.

김영삼 정부 때인 1993년 노동부는 파업기간 중에도 생활보장적 임금을 지급하는 무노동부분임금제를 도입하겠다는 방침을 밝혀 전국 산업현장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 무노동부분임금제 파동이 쉽게 가라앉지 않자 결국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95년 임금을 교환적 부분과 생활보장적 부분으로 나눌 어떠한 법률적 근거도 없다며 임금이분설을 폐기하는 결정을 내렸다. 생활보장적 임금도 근로의 대가로 보는 임금일체설을 주장한 경영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법리만을 고집하기보다 파업이 넘쳐나는 현실을 감안한 판결이었다.

그런데 2013년과 지난해 대법원 판결은 노사의 사적 자치를 완전히 배제한 채 법리만을 따진 판결이란 지적이 나온다. 현장을 제대로 모르는 대법관들이 현장 노사 간 임금문제에 개입하다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판결을 냈다는 것이다. 더구나 법리도 일관성 있게 적용한 게 아니어서 대법원이 질타를 받고 있다. 소급적용은 안 된다고 했지만 이번 판결로 노동현장은 벌써부터 잔치상 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산하 지부에 통상임금과 관련된 기존 노사 합의를 원천 무효로 하고 회사 측에 ‘2024년도 미사용 연차 수당’부터 올려 받아야 한다는 지침을 내렸다. 통상임금 관련 잔치판이 벌어졌으니 빨리 소송에 가세해 제몫을 챙기라는 독촉이다. 한 노조 소식지에는 “대법원에서 밥상 차려 줬다. 떠먹는 건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이다. 지도부는 당장 보충 교섭 요구하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노사관계는 노사자치를 대원칙으로 한다. 노사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법부가 노사관계에 일일이 개입하는 것은 오히려 임금체계 왜곡만 부추길 뿐 노사자치주의가 뿌리 내리는 것을 방해한다. 노사의 자율 결정을 존중해야 건전한 노사협상문화가 정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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