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학생이 주는 꽃 한 송이 외에는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 으름장으로 들리는 스승의 날이다. 김영란법의 위력 앞에 스승과 제자 사이의 정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는 것 같다. 선생님을 마치 촌지나 선물에 환장한 잠재적 범죄자로 몰아가는 세상을 향해 선생님들이 분노하며 차라리 스승의 날을 폐지해 달라는 청원을 내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방학(放學)은 문자 그대로 배우는 일을 놓고 쉬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방학이라고 아이들을 무조건 놀게 놔두는 학교나 부모는 없다.
예기 학기(學記)에서는 방학 때 어떻게 하라고 했을까? “대학의 가르침은 계절에 따라서 달리한다.”[大學之敎也 時敎 必有正業] 여기서 말하는 대학이 오늘날의 그 대학은 아니다. 계절에 따른 교육은 봄과 가을에 주로 예악
옥돌을 자르고 닦고 쪼고 간다. 이른바 절차탁마(切磋琢磨), 열심히 학문과 도덕 기예를 닦는 모습이다. 시경 위풍(衛風) 기욱(淇奧)편에 나온다. 학문과 덕을 쌓은 군자를 찬양하는 노래다. 奧은 ‘벼랑 욱’으로 읽는다. “저 기수 벼랑을 보니/푸른 대나무 야들야들하네/문채 나는 군자여/잘라놓은 듯 다듬어 놓은 듯/쪼아 놓은 듯 갈아 놓은 듯하시네./치밀하고
우리 속담에 “글 모르는 귀신 없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글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수학무조(修學務早), 학문은 기억력이 왕성한 소년시대에 해야 한다니 나이 들어 하는 공부는 보람도, 진척도 없는 것일까?
그러나 나이가 어떻든 배워야 한다. 배우는 일에는 끝이 없다. 다만 경계해야 할 게 있다. 예기 학기(學記)는 “배우는 사람이
남이 지어주었든 스스로 지었든 아호에는 본인과 남들의 지향과 바람이 담겨 있다. 가령 신독재(愼獨齋)나 신독(愼獨)은 “군자는 반드시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君子必愼其獨也]는 대학, 중용의 말에서 따온 아호다. 다산 정약용은 “하늘은 형상도 소리도 없지만 인간을 낱낱이 굽어보고 있으니, 이런 사실을 깨달아 깜깜한 방에 혼자 있을 때에도
제대로 배워서 아는 사람은 옛일을 널리 알고 현재의 일에도 두루 통한다. 바로 박고통금(博古通今)이다. 이와 달리 배운 것을 남에게 전하기만 할 뿐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공부가 있다. 학문을 입과 귀로만 하는 구이지학(口耳之學)이다. 순자(荀子) 권학편(勸學篇)에 이렇게 씌어 있다. “(구이지학은) 소인의 학문이다. 귀로 들은 것이 입으로 나온다. 입과
[하루 한 생각] 4월 4일 엽등월급(躐等越級)
등급을 걸러 뛰어 오름
임철순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옛사람들은 단계를 밟지 않고 건너뛰는 공부를 허탄(虛誕)하다고 경계했다. ‘맹자’ 이루하편(離婁下篇)에 나오는 영과이후진(盈科而後進)은 중요한 학문 지침이었다. “샘이 깊은 물은 퐁퐁 솟아올라 밤낮을 쉬지 않고 흘러간다. 구덩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