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웃음소리> 내가 한 철 - 시집 <뿔을 적시며>에서 |
---|
![](https://img.etoday.co.kr/pto_db/2017/07/20170704103246_1089630_200_200.jpg)
오디 철이 가고 살구가 익는다. 북천 다리를 건너면 마당에 큰 살구나무가 선 집이 있었다. 이맘때면 황금처럼 누우런 살구가 마당에 지천이어도 누구 하나 줍는 사람이 없었다. 요즘은 돈과 물자가 흔하다. 그래서 무엇이든 살 수 있고 무엇이든 사 먹어야 맛있는 줄 안다. 그래서 살구나무는 살구가 익을 때만 기다리며 오며 가며 쳐다보던 동네 아이들이 그립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무안하고 슬펐을 것이다.
관련 뉴스
그 무렵 햇빛에 몸을 번쩍이며 흐르던 북천 강둑에서 어떤 사미승(沙彌僧)이 마을 처자에게 오디를 따주던 풍경이 실제 있었는지 아니면 나의 상상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시의 효과를 위해서는 그게 나의 문학적 상상력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부드럽고 환한 햇살 아래 사미승은 흰 얼굴에 안경을 썼던지 수줍고 정결한 풍경이지만 그날 사미는 행자(行者)로서 계(戒)를 두 개나 어겼다.
그가 지켜야 할 사미계 중에는 음행(淫行)을 하지 말 것과 때가 아니면 먹지 말라는 것도 있다. 그러나 살다가 헤어지기도 좋은 날, 대낮에 동네 처자에게 오디를 따주는 것을 음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한 움큼씩 따 먹어도 공복을 달래주지 못하는 오디로 끼니를 때웠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천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
그 사미와 동네 처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청정비구(淸淨比丘)가 되어 수행에 여념이 없을까, 아니면 그 처자와 혼인하여 골짜기 어디쯤 펜션이라도 짓고 손님을 받고 있을까. 살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온몸이 환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가는 삶이나 사랑의 매일매일이 어느 해 봄날에 본 것 같은 그런 광경의 연속이거나 일부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주 세월이 많이 흐르면 그때 그 사미승이 나 자신이었다고 말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