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기업들, 기술 혁신 및 AI 도입으로 위기 극복 나서
“중국의 제조업 성장 속도가 정말 무섭습니다. 반도체 쪽에서도 우리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치고 올라왔습니다.”
지난해 말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국제수입박람회(CIIE)에 다녀온 한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 A 대표는 현지 반도체 기술력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으로 미국 규제가 심해지자 중국 정부가 보조금을 앞세워 자국 반도체 기업에 힘을 실어주면서 기술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한강의 기적’을 이끌며 대한민국 경제의 기둥으로 자리 잡았던 제조업이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 패권 경쟁이 더욱 격화되고, 중국이 급속도로 추격해오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제조 강국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각국의 자국 중심주의 강화로 인해 글로벌 공급망은 재편되고 있으며, 저출산과 저성장 기조 속 대한민국 제조업 미래에 먹구름이 끼었다.
위기는 기회이기도 하다. A 대표는 “중국 반도체 산업 성장으로 새로운 시장이 생긴 것”이라며 “현지 반도체 업체에 장비를 납품해 매출 성장을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제조업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가운데, 대한민국 제조업은 도전에 맞서 다시 뛰고 있다. 변화와 혁신의 중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국가대표 기업들의 재도약에 우리 경제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6일 각종 통계 지표를 보면,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 여지 없이 드러난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작년 11월 전산업생산은 전년 같은기간보다 0.3% 줄었다. 전달 2.4% 성장세에서 감소세로 전환했다. 주요 제조업인 자동차(-6.7%), 전자부품(-10.2%) 등이 감소세를 보이며 부진을 이어갔다.
특히 재고율(112.3%→111.8%)이 전월에 이어 높은 수준을 기록한 가운데, 평균가동률(72.3%→71.8%)은 하락하는 등 제조업생산의 둔화를 시사하는 지표가 점증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월 경제 동향을 발표하며 “최근 우리 경제는 생산 증가세가 둔화되면서 경기 개선이 지연되는 가운데,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경제심리 위축으로 경기 하방 위험이 증대되는 모습”이라고 밝혔다.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1분기 제조업 경기실사지수에선 시황(87)과 매출(88) BSI 모두 100 기준치를 밑돌았다. 3분기 연속 하락세다.
제조업 위기는 수출 부진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한국경제인협회가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 중 12대 수출 주력 업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5년 수출 전망 조사’를 보면, 한국의 올해 수출 증가율은 전년 대비 1.4% 기록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관세청이 집계한 지난해 수출 증가율(8.3%, 1~11월 기준)보다 약 7%포인트 낮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올해 1분기 수출산업 경기 전망지수(EBSI)로 96.1를 제시했다. 4개 분기 만에 기준선 100아래로 떨어졌다.
한국의 대표 제조업체들은 기술 혁신과 인공지능(AI) 도입 등을 통해 위기 극복에 나섰다.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7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박람회‘CES 2025’ 현장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재용 회장이 세상에 없는 기술을 화두로 던진 이후 사업부별로 신기술과 제품을 만들고 있다”며 “올해 하반기에 시작해 내년부터 관련 제품이 출시될 예정”이라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모빌리티 혁신을 위해 전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이끌고 있는 엔비디아와 손을 잡았다.
과감한 투자도 이어가고 있다. 현대차그룹이 올해 24조3000억 원 규모의 역대급 국내 투자 계획 카드를 꺼내든 것이 대표적이다. 특히 전체 투자 규모의 47%(11조5000억 원)가 연구개발(R&D) 투자에 집중돼 있다. 삼성과 LG, SK 등 주요 그룹도 올해 대규모 투자를 집행할 계획이다.
우리 제조업이 그간 큰 위기 극복해 온 DNA가 있다는 점도 긍적적이다. 1973년 오일쇼크 당시 우리 기업은 산유국들의 건설특수를 장악했다. 1980년 중동 건설 수주액은 1975년의 10배를 넘어섰다. 1998년 IMF(국제통화기금) 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도 잘 버텨냈다.
한국 제조업이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고 다시 한 번 ‘제조업 르네상스’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 간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정부는 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규제를 완화하며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한미 FTA 체결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박태호 광장 국제통상연구원장은 “우리 경제의 미래 발전은 대기업에 달려있다"며 "대기업이 전 세계 각국에서 생산하고, 거기에 필요한 건 우리 소부장 기업들이 제공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것도 일종의 수출이며, 해외 투자를 통해 수출을 유도할 수 있다"며 "이 과정이 선순환된다면 우리나라 기업들이 첨단 분야 소재·부품·장비 공급의 허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