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국내 상장사들이 앞다퉈 토지, 건물 등 유형자산의 재평가를 실시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에 강력한 드라이브(시동)를 걸자 주가순자산비율(PBR)을 1배 미만으로 낮아 보이게 만들 목적으로 풀이된다. 밸류업 목적인 주주환원와과 별개로 재무재표만 손보면서 투자자 착시를 꾀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해 자산재평가 사업계획을 발표한 상장사는 22곳으로 2023년 14곳보다 57% 증가했다. 2019년(12곳), 2020년(8곳), 2021년(18곳)과 비교해도 역대 최대 규모다.
시장별로 보면 코스닥 시장이 14곳으로 가장 많았고, 유가증권시장 5곳, 코넥스 3곳이었다. 상장사들은 토지, 본사 사옥 건물 등 유형자산의 재평가를 통해 평균 340억 원가량 차익을 불렸다. 이를 통해 전체 자산총액의 적게는 2%대부터 최대 97%에 육박하는 잉여금을 마련했다.
코스닥 상장사 아이앤씨는 자산 재평가를 통해 자산총액 대비 가장 많은 차익을 얻었다. 아이앤씨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에 위치한 토지 및 건물의 자산가치 감정평가를 의뢰해 총 655억 원의 차액을 얻었다. 이는 아이앤씨 전체 자산총액의 97%에 달하는 규모다.
1996년 설립 당시 분당구 판교에 부지 매입을 결정한 게 묘수가 됐다. 당시 81억 원에 불과했던 아이앤씨의 투자용 부동산은 지난해 3월 367억 원으로 4배 넘게 뛰었다. 2005년 판교테크노밸리 조성 인가가 나면서 IT기업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현재 이 지역의 평균 부동산 시세는 약 15억 원에 형성하고 있다.
그룹사가 줄줄이 자산재평가에 나선 곳도 있다. JW그룹은 계열사 JW신약, JW생명과학, JW중외제약이 나란히 자산재평가를 받았다. 이는 설립 이래 처음이다. JW중외제약은 경기 시흥, 강원도 평창군 대관령에 위치한 알펜시아 카지노를 비롯한 자산을 재평가해 180억 원의 차익을 얻었다.
자산재평가 열풍은 지난해 정부 주도의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 프로그램’이 시작된 영향으로 보인다. 밸류업 프로그램은 주가순자산비율(PBR) 1배 미만인 기업, 즉 주가가 보유 자산을 모두 매각했을 때보다 낮은 기업들을 발굴해 PBR 가치를 1배 이상으로 올리자는 취지다. 시가총액보다 자산이 더 많은 기업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에 자산재평가와 같은 자본확충 수단을 통해 재무구조를 개선해 PBR을 낮아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로 보인다. 투자자들 사이에 PBR 1배 미만인 기업은 향후 주가가치 상승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매수세가 몰렸기 때문이다. 주가가 상승하면 기업은 더 많은 자본 확충이 가능해진다. 증권가 리서치센터에서는 당시 PBR 1배 미만 기업들을 분석한 증권사리포트를 쏟아내기도 했다.
국내에서 자산재평가는 1998년 국제금융위기(IMF) 때 일시적으로 허용된 후 줄곧 금지됐다. 기업의 실질적 부채는 줄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 부채비율을 낮추는 착시효과라는 비판 때문이다. 경기 불황이 심화하자 부실기업들은 재무제표상 부채비율을 낮추기 위해 자산재평가를 통한 자산과 자본 증가 효과를 통한 재무구조 개선을 대거 노렸다.
자산재평가는 2009년 국제회계기준(IFRS)을 도입을 앞두고 다시 등장했다. 사실 기업 입장에서 자산재평가는 득보다 실이 더 많다. 재평가를 받기 위해 회계법인 또는 감정평가 기관에 의뢰할 경우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평가 차익을 통해 얻은 자산에서 떼이는 세금 규모도 만만치 않다. 이에 기업들은 보유 중이던 자산의 가치 상승이 예상되더라도 재평가를 받지 않고 두는 경우가 많았다.
자산재평가가 밸류업과 함께 다시 등장했지만, 정작 코리아 디스카운트(국내 증시 저평가) 상태는 그대로라는 비판이 나온다. 자산재평가를 실시한 기업 중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과 소각 등으로 이어진 곳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