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 지향 EU 정신과 충돌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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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지난달 4일 미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트럼프 당선자를 만났다. 트럼프가 취임 전에 집에서 만난 유럽의 지도자는 멜로니 이외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뿐이다. 오르반은 선거 때부터 트럼프를 열성적으로 지지했다. 멜로니는 또 1월 20일 취임식에도 참석한 유일한 유럽지도자다.
일부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고 멜로니가 유럽연합(EU)의 새로운 리더로 부상 중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강경한 이민정책을 포함한 자국우선 정책 등에서 트럼프의 정책과 유사하다. 그러나 무역과 국방비 지출에서 이탈리아와 미국 간 갈등 요소가 있고, 자국우선 정책은 경제·정치블록 EU와 충돌할 수밖에 없어 멜로니 총리가 유럽무대에서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트럼프는 멜로니를 ‘멋진 여성’이라고 치켜세웠다. 멜로니 총리는 트럼프보다 앞서 불법 이민 추방 등의 정책을 시행해왔다. 지난달 31일 로마법원은 알바니아에서 이탈리아 난민 신청자를 심사하는 게 불법이라고 판시했다. 작년 10월에 이어 세 번째 동일한 판결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는 판결에 아랑곳하지 않고 알바니아에서 난민 신청자 절차를 진행 중이다. 지중해를 통한 불법 난민이 급증하고 시민 반발이 거세지자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와 협약을 맺고 경제지원의 대가로 이곳에 난민수용소를 세웠다. 여기서 이탈리아로 들어온 난민 신청자를 수용하고 관련 절차를 진행한다. 트럼프는 취임 첫날 불법 이민단속을 천명하며 군을 남부 국경에 파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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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니는 2022년 10월에 집권했으나 진작부터 트럼프를 존경해왔다. 트럼프 집권 1기 때 야당이던 이탈리아형제당을 이끌던 그는 당시 백악관 수석전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을 자국으로 초청해 주요 연사로 극우정책을 적극 홍보하게 했다. 트럼프와 멜로니는 이처럼 이념적 성향과 정책에서 흡사하다.
유럽연합 27개 회원국은 트럼프발 관세전쟁에 대비 중이다. 트럼프는 지난달 말 스위스 다보스포럼 화상연설에서 유럽연합의 불공정한 무역관례와 규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멜로니는 그래도 트럼프와 수시로 대화가 가능한, 유럽의 입장을 전달할 수 있는 소통 창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부에서는 기대한다.
싫어하는 지도자를 앞에 두고 티를 팍팍내는 트럼프의 심성을 아는 EU 일부 회원국에서 이런 바람이 있다. 멜로니 총리도 자국의 이익을 증진하면서 EU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소통창구 역할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멜로니는 또 트럼프의 오른팔이 된 일론 머스크와도 친밀하다. 조기총선 선거전이 한창인데 머스크는 극우 독일대안당을 지지해 독일의 주요 정당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게다가 가짜뉴스로 영국의 집권 노동당을 강력하게 비판해 불편한 관계에 있는 것과 다르게, 여성총리와 백만장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이 당선인 시절이던 1월 4일 마러라고의 트럼프 자택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와 만나 함께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https://img.etoday.co.kr/pto_db/2025/02/20250212160547_2135993_360_240.jpg)
멜로니는 지난달 초 트럼프 당선자에 이어 머스크도 만났다. 총리는 이 자리에서 15억 달러, 약 2조1800억여 원을 지불해 스타링크를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지상 300~600km 지점에 있는 인공위성을 이용한 인터넷서비스가 스타링크다. 이탈리아는 이를 통신 서비스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EU는 106억 유로, 약 16조 원을 들여 260개 저중궤도 위성을 띄워 2030년까지 회원국들에 안전한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이런 EU의 계획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머스크에 큰 이권을 줬다. 이탈리아의 야당 민주당은 머스크와의 계약을 두고 “자체적인 통신 서비스를 구축하려는 EU 계획에서 벗어나 이탈리아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EU도 이탈리아의 이런 일방적인 정책에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다.
트럼프와의 정책적 유사성에도 멜로니의 이런 자국 우선 정책은 한계가 있다. 이탈리아는 미국과의 교역에서 얻는 흑자가 전체 흑자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2023년 미국과의 교역에서 440억 달러를 기록했고 아직 집계가 되지 않았지만 지난해에도 이 정도 수준을 유지한 것으로 예상된다. 트럼프는 EU 회원국 가운데 최대의 무역 적자를 기록 중인 독일을 우선 타깃으로 공격해왔지만 이탈리아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이탈리아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 대비 1.5%에 불과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회원국들이 약속한 2%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트럼프는 나토의 유럽회원국 가운데 아직 2%를 달성하지 못한 8개 국가 가운데 우선 스페인을 집중 비판해왔다. 하지만 트럼프는 막대한 무역적자와 함께 국방비 지출 목표를 지키지 못한 이탈리아를 언제까지 그대로 놔둘까?
미국과 이탈리아의 갈등이 깊어지면 멜로니는 응당 트럼프와의 긴밀한 관계를 적극 활용해 양자 합의를 이루는 데 전력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자신도 EU라는 지역블록을 성가진 존재로 여기며 독일이나 프랑스 등 개별 EU 국가들과의 양자 딜을 우선해 왔다. 트럼프 2.0 앞에서 EU 내에는 더 단결해야 대미 협상력을 제고할 수 있다는 EU 중심 협상을 선호하는 회원국들과, 양자 딜을 선호하는 회원국들이 있다. 멜로니가 양자 딜에 매달릴수록 EU 회원국들의 불만은 높아지고 EU 안에서 이탈리아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로마소재 국제문제연구소의 나탈리 토치 소장은 “멜로니가 트럼프와 합의해 관세부과를 완화한다면 이는 EU가 독점하는 통상정책을 약화하게 된다”며 “이게 바로 트럼프가 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자국 이익을 유럽의 이익으로 포장하는 데 익숙하다. 임기 2년 3개월을 남겨둔 마크롱 대통령은 레임덕에 빠졌지만 트럼프의 미국 우선정책에 맞서 EU가 단결해야 한다는 그의 정책은 EU 회원국들의 공감을 얻어 왔다. 지역블록 EU를 국익 증진에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유럽의 리더가 되려면 자국의 이익 증진과 공동체 EU의 이익 증대를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하지만 멜로니의 이제까지 행보를 보면 국익 우선이 너무 확연하게 드러난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 정책은 여성 총리의 이탈리아 우선 입장과 조만간 충돌을 빚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이탈리아가 유럽의 리더로 부상하는 것은 어렵다. 대구대 교수(국제정치학)
‘하룻밤에 읽는 독일사’ 저자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