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종전 과정서 철저하게 ‘패싱’
주도권 놓치면 재건 때도 패싱 우려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을 둘러싸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날을 세웠다.
17일(현지시간) 유로뉴스와 프랑스24, 영국 일간 가디언 등 현지 매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영국과 독일ㆍ프랑스ㆍ이탈리아ㆍ스페인ㆍ네덜란드ㆍ덴마크ㆍ폴란드 정상이 프랑스에 긴급히 모였다.
프랑스 대통령실인 엘리제궁에서 열린 비공개 회동에는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사무총장도 동석했다.
회동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먼저 제안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유럽 주요국을 건너뛴 채, 러시아와 직접 대화에 나서면서 긴급한 대응책 마련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관련 뉴스
실제로 18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미국과 러시아의 외무장관 회담이 예고됐다. 정상회담에 앞선 고위급 실무회담이다. 크렘린궁 측은 로이터통신에 “미국과 협상할 것이고, 이것은 분명한 양자 협의”라며 “제3국이 포함된 회담은 있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철저하게 EU가 제외된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EU와 영국이 긴급회동에 나섰고, 서둘러 의견을 결정했다. 우크라이나 종전 과정에서 이른바 ‘EU 패싱’이 불거질 경우, 우크라이나 재건 과정에서도 같은 현상이 이어질 수 있다.
회의에서 EU 주요국 정상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종전 협상 과정에서 독단적 행보에 나선 것에 대해 “평화협정을 동시에 체결하지 않은 채 휴전부터 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반발했다. 원론적인 생각을 밝혔지만, 내면에는 종전 협상 과정에서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겼다고 가디언은 풀이했다.
EU 주요기구 대표 역시 회동에 앞서 의중을 드러냈다.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파리에 도착한 직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유럽의 안보가 전환점을 맞았다”라며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것이지만, 우리 모두와 연관돼 있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코스타 EU 상임의장도 “이번 회의는 하나의 과정”이라며 “EU와 회원국들은 이 과정에서 중심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적었다. 미국이 종전 협상에 예고 없이 나서면서 줄어든 EU의 입지를 대변한 발언이기도 하다.

이날 회의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주둔할 EU 중심의 ‘평화유지군’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현재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적극적이다. 일찌감치 프랑스가 평화유지군 파병을 제안했고, 전날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도 데일리 텔레그래프 기고문을 통해 동의했다.
현지 언론은 잇따라 현재 상황을 비판하고 지적했다. 데일리메일은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은 반드시 유럽이 주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프랑스24는 “트럼프 권력행사로 EU의 무능함과 무력함이 드러났다”고 맹비난했다.
이처럼 주도권을 쥐고 싶지만, 우크라이나 지원 여력과 예산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들에게 걸림돌이다. 영국 가디언은 “EU가 미국을 배제한 채로 우크라이나 재건과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한편, EU 회원국 가운데 이날 파리 회동에 비판적 시각을 내비친 곳도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친러시아 성향의 헝가리는 외무장관 성명을 통해 “불만에 가득 찬 EU 지도자들이 우크라이나의 평화 협정을 막으려 한다”며 “우리는 미국과 러시아의 협상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슬로바키아도 유럽 주도 평화유지군 창설에 대해 “결코 EU가 관여할 수 없는 문제”라고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