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벤츠에서 날아온 초청장 한 장 달랑 들고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메르세데스-벤츠의 다양한 ‘고성능 로드스터를 시승할 수 있다’고 했다. 당시(SLS AMG 데뷔전) 벤츠 고성능 로드스터의 심벌은 SLR 맥라렌이었다. F1 기술을 잔뜩 품은 고성능 걸윙 도어 슈퍼카였다.
벤츠는 “SLR의 ‘원초적인 매력(Basic instinct)’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기자는 그렇게 SLR을 시승하겠다며 드라이빙 슈즈와 글러브를 챙겨 떠났다.
그러나 아뿔싸. 시승회에 나타난 SLR의 ‘원초적 매력’은 매끈하게 빠진 신형이 아니었다. 바로 메르세데스-벤츠의 전설의 슈퍼카 1953년형 300 SL이었다. 실망은커녕 벅찬 감동에 소름까지 돋았었다.
50살을 훌쩍 넘긴 ‘고성능 클래식 슈퍼카’ 시승은 그때나 지금이나 흔한 기회가 아니다. 벤츠는 한국에서 날아온 자동차 기자에게 겁도 없이 키를 넘겨주고 “마음껏 타보라”고 했다. 난 브레이크가 고장나면 차에서 뛰어내려 온몸으로 막을 생각까지 했었다. ‘사람 나고 차가 낳다’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그렇게 전설의 슈퍼카는 마음속 이상과 현실사이에 들어와 지금까지 또렷하게 남아있었다.
◇1953년 300 SL의 21세기 버전=그렇게 6년 만에 300 SL을 다시 만났다. 똑같은 모양의 걸윙도어를 하고 나타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300 SL의 21세기 버전이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SLS AMG였다.
SLS AMG는 2009년 프랑크푸르트 모터쇼를 통해 공개됐다. 전신은 SLR 맥라렌. 원조는 195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스포츠카 300 SL이다.
SLS AMG는 메르세데스-벤츠가 추구하는 고성능 슈퍼카의 정점이다.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만들어낸, 미드십(엔진이 차체 중앙에 자리한) 구성의 슈퍼카 울타리를 벗어난 첫 번째 모델이다.
엔진이 운전석 뒤에 있어야만 슈퍼카라는 편견을 깨트린 의미있는 모델이기도 하다.
시승은 독일 작센에 자리한 작센링(Ring)에서 이뤄졌다. 독일 3대 모터스포츠의 성지에서 만난 SLS AMG는 바라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팍을 짓누르며 다가온다. 고성능 슈퍼 스포츠카를 타고 공도에 나선다는 건 죄악이다.
마침내 손에 SLS AMG의 이그니션 키가 쥐어졌다. 늘 머릿속에 그려오던 ‘언젠가 그 날’은 이렇게 시작됐다.
페라리 스쿠데리아,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를 타면서도 이렇게 가슴 설레지 않았었다. 이유는 하나. 1953년 등장한 전설속 수퍼카의 부활이기 때문이다.
차에 타는 것도 일이다. 뚱뚱한 몸을 힘겹게 운전석에 구겨 넣었다. 그리고 이내 황당해져서 후다닥 차에서 내렸다. 하늘을 향해 마음껏 치켜 올라간, 멋들어진 걸윙 도어에 손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머릿속에 순서를 그려보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으며 차에 오른다. 왼손으로 도어를 잡으면서 차에 올라타야 도어를 닫을 수 있다. 한번 반하고 나니 이런 불편함마저 매력으로 보인다. 그렇게 SLS AMG와의 스킨십이 시작됐다.
운전석에 파묻혀 실내를 살핀다. 오로지 달리기 위한 최소한의 편의장비가 온몸을 감싼다. 메르세데스-벤츠의 감성품질이 가득한 인테리어는 슈퍼카의 고성능에 모자람이 없다.
가죽 시트는 팽팽하고 딱딱하다. 엉덩이를 깊숙이 구겨넣으면 시트는 몸을 집어삼키듯 허리춤을 붙잡는다. 다양한 조절기능 대신 극한의 상황에도 온몸을 잡아주는 역할이 더 클 것이다. 심플하지만 흠잡을 곳 없이 정교한 실내는 전설의 벤츠 SL의 아우라를 가득 담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 SLS AMG에 얹은 엔진은 V8 6.3리터 프런트-미드십 엔진이다. 엔진을 앞 차축 뒤에 장착하고 그 뒤에 내가 앉았다. 그리고 다시 엉덩이 뒤에 뒷 차축이 자리한다.
최고출력 571마력 엔진은 AMG 스피드시프트 DCT 7단 변속기와 맞물린다. 이를 바탕으로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 가속을 고작 3.8초 만에 달려간다. 가속을 이어가면 최고시속 317km까지 치솟는다. 이후부터는 안전을 위해 스스로 연료를 차단한다.
◇극한 상황에서도 탄탄한 알루미늄 섀시 인상적=시동을 걸자 우렁찬 엔진음이 터진다.
이내 머플러를 빠져나온 배기음이 땅을 뒤흔든다. 정갈하게 다듬어낸 V8 세단의 음색이 아닌, 한 움큼 쏟아져 나오는 육중한 배기 사운드가 인상적이다.
제자리에 서서 스티어링 휠을 감자 넓적한 앞타이어가 요란스레 아스팔트를 긁어댄다. 순간, 미처 차에 적응하기도 전에 서킷에 내동댕이쳐졌다. 액셀페달은 가볍다. 반 템포 늦게 반응하는 벤츠의 특성은 온데간데없다. 발끝으로 툭툭 쳐 엔진회전수를 높이자 성난 울음소리가 등을 후려친다. 자극적인 음색에 소름까지 돋는다.
승차감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엄청나게 딱딱하다. 크고 작은 요철을 쿵쿵대며 넘어간다. 거꾸로 차체 강성은 무척 인상적이다. 차체가 비틀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초경량 알루미늄 섀시와 보디를 구성했지만 탄탄함은 돌덩이 같다.
앞머리가 코너에 진입하면 운전석은 코너 바깥으로 흘러나간다. 이 현상이 반복될 때마다 서늘함이 온몸을 감싼다. 흡사 오버스티어 감각이지만 사실은 아니다. 차 전체 길이에서 운전석이 뒷부분에 자리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뉴트럴 스티어로 코너를 휘감아도 공포감은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경주차 영역을 넘나드는 양산 슈퍼카=작센링은 명물(?)이었다. 단순한 헤어핀이 아닌 오메가(Ω)턴이 이어진다.
이것도 무서운데 오메가 턴의 정점까지가 급경사 내리막이다. 이 지점을 지나면 서킷은 하늘로 치솟는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이 구간에서 ESP가 미친 듯이 작동하고 있다. 웬만한 운전자가 아니면 감히 덤비기 어려운 차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직선로에 풀가속하면 좌우 풍광은 고스란히 무너진다. 다음코너가 시선의 중심에 모아질 뿐이다.
엔진 브레이크로 과감하게 속도를 줄이고 코너의 정점에서 다시 풀가속한다. 엔진회전수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며 가슴이 뻐근한 가속이 시작된다. 발끝에 머물러있는 8기통 엔진은 쉼 없이 서늘한 배기음을 뿜어낸다.
AMG 세라믹 브레이크 시스템을 되뇌일 때마다 점진적으로 코너에 뛰어드는 모습이 과격해진다. 믿음이 생기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차에 익숙해진다. 예상했던 것보다 운전은 훨씬 쉬웠다. 첨단 전자장비가 코너마다 이어지는 나의 실수를 다독여주고 있는 것도 안심이다.
단순하게 엔진 성능만 끌어올리는 변화가 아닌 안전을 염두에둔 ‘진화’(進化)다.
자신감이 붙으면서 조금씩 한계상황에 접근한다. 경주차와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운전자의 아드레날린은 커진다.
SLS AMG는 전투적인 퓨어 스포츠카와 짜릿한 슈퍼카의 경계를 넘다들며 운전자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시승을 마치고 도어를 열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치켜 올라가는 걸윙 도어의 끝에는 카리스마가 걸려있다.
그리고 반세기를 넘나들며 메르세데스-AMG의 고성능을 경험했다는 나의 자신감도 오롯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