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 이야기] 22. 가장 유명한 이야기의 진실

입력 2018-08-1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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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경 보험업에 종사하던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1837~1901: Lewis Edson Waterman)은 초대형 보험계약의 성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고객이 서명하려는 순간 펜에서 잉크가 툭 떨어져 계약서를 망치고 말았다. 여분의 계약서를 준비하지 못한 워터맨은 새 계약서를 가지러 서둘러 사무실을 다녀왔지만 그 사이 계약은 경쟁사에 넘어가고 말았다.

워터맨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여 울컥 토하지 않는 펜을 만들 것을 결심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모세관 현상을 이용하여 문제없는 만년필을 만들었다. 짧지만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는 만년필의 문외한이라도 한 번 정도 들었을 유명한 것이다.

그런데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상한 부분이 한두 곳이 아니다. 툭하면 잉크가 떨어지는 펜밖에 없는 시절에 여분의 계약서를 준비하지 않은 것, 때마침 경쟁자가 나타난 것, 기다려 주지 않고 냉큼 다른 사람과 계약서에 서명한 고객 등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게다가 1880년경엔 서명 정도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펜이 꽤 여럿 있었다. 예컨대 캐나다 출신 던컨 매킨넌이 만든 스타이로그래픽 펜(stylographic pen)은 샤프와 비슷한 모양이라 지금은 만년필로 분류되지 않지만 당시엔 만년필에 속하였다. 1875년에 등장한 이 던컨 펜은 쓰기 쉽고 빠르며, 내구력 있고 깨끗하다는 광고 덕에 꽤 많이 팔렸다. 매킨넌 펜의 고객 중에는 초기 만년필 역사에 매번 등장하는 마크 트웨인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때문에 최근엔 이 유명한 이야기는 펜 연구가들 사이에선 사실이 아닌 허구로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왜 만들어진 것일까? 일종의 마케팅이었다. 창업자를 여분의 계약서를 준비하지 않은 준비성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최초의 문제없고 쓸모 있는 펜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데 이 이야기는 효과 만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창업자 워터맨이 살아 있을 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뛰어난 발명가이기도 하지만, 사업수완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1883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 하루에 한 개 정도 만년필을 판매하였지만, 1901년 사망하던 해에는 하루에 천 개를 파는, 생전에 성공한 사업가였다. 이야기가 처음 나온 시점은 사후 11년쯤 지난 1912년인데 당시 워터맨사는 위기를 맞고 있었다.

▲루이스 E. 워터맨
▲루이스 E. 워터맨
1910년대에도 워터맨사는 매출 1위를 달리고 있었지만, 창업자가 살아 있을 때보다는 그 기세가 한풀 꺾여 있었다. 스포이트 없이 잉크를 충전하는 방식이 그 시절의 최고 관심사였는데 워터맨사는 적절한 걸 만들지 못해 고전 중이었다. 당시 경쟁회사인 콘클린사의 잉크 충전방식이 가장 각광(脚光)을 받고 있었다.

이것은 크레센트 필러(Crescent Filler)로 불렸는데, 펜 내부에 고무 튜브를 넣고 기다란 판을 위에 올리고 초승달 모양의 고리를 붙였는데 이 초승달 모양의 고리를 누르면 잉크가 들어왔다. 이것이 워터맨사의 것보다 훨씬 더 편리했다.

이 이야기의 좀 더 발전된 버전이 약 10년 뒤 1921년에 등장한다. 1920년대는 만년필 황금기의 시작, 즉 워터맨의 독주가 깨진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로 셰퍼의 평생보증과 파커의 컬러 마케팅으로 워터맨은 이 새로운 공격에 쩔쩔 매고 있던 시기였다. 결국 이 이야기는 위기와 곤경 때문에 마케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년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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