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재임 시절 연평균 성장률 8.3%
미와 핵협정 체결로 동맹 관계로 전환
‘인도 경제자유화의 설계자’, ‘인도의 경제 개혁가’, ‘현대 인도 경제의 아버지’, ‘핵 협상의 중재자’, ‘아시아의 목소리’ 등으로 불린 만모한 싱 전(前) 인도 총리가 26일(현지시간)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보도했다.
싱 총리는 이날 자택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어 뉴델리에 있는 인도의학연구소에 입원했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병원은 성명서를 통해 그가 최근 노인성 질환으로 치료를 받아왔다고 설명했다.
2014년 싱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된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엑스(X·옛 트위터)에 싱의 비보에 “수년에 걸쳐 우리 경제 정책에 강한 각인을 남긴 인도의 가장 뛰어난 지도자 중 한 명”이라면서 “모든 국민이 그의 상실을 애도한다”고 말했다.
싱 전 총리는 1932년 9월 26일 영국 통치 시절인 인도(현재는 파키스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현지 펀자브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ㆍ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옥스퍼드대에서 인도의 무역과 경제성장이라는 주제로 쓴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땄다.
그는 존경받는 경제학자가 됐고,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인도중앙은행(RBI) 총재로 재직하며 금융정책에 이바지했다.
1991년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돼 1996년까지의 임기 동안 인도 경제를 심각한 지불수지 위기로부터 구해냈다. 당시 인도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문제로 외화 보유액이 거의 바닥 났으며 정부는 해외 채무를 상환할 능력이 없어 디폴트 가능성이 제기됐다. 이에 그는 당시 사회주의 경제 체제였던 인도에 자유화 및 시장 개방 정책을 도입하고 경제개혁을 이끌었다.
인도 국민회의당 소속으로 2004년에는 총리직에 올라 2010년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에서도 그의 총리 재임 기간 연평균 8.3%의 기록적인 경제 성장을 주도했다.
그는 시크교도 출신으로 역대 첫 비 힌두교 총리라는 기록도 세웠다. 인도 내 시크교도 인구는 약 2%를 차지한다. 인도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를 맡았으며, 중앙은행 총재, 재무장관, 총리 등을 모두 역임한 유일한 인도인이다.
2006년 합의 뒤 2008년 공식 발효된 미국-인도 간 핵 협력 협정 체결도 싱의 주요 성과로 꼽힌다. 조지 부시 당시 미 행정부와 체결한 이 협정은 인도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핵기술과 연료를 받는 것이 골자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미국과 민간 핵기술에 대한 평화적 거래가 가능하게 됐을 뿐만 아니라 1998년 인도의 핵실험 등으로 냉랭했던 미국과 인도 관계가 동맹으로 전환된 것으로 평가된다.
하늘색 터번과 흰색 튜닉을 즐겨 입은 그는 청렴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정치적으로는 소극적이라는 비판도 있었으나, 뛰어난 경제정책 성과와 안정적인 지도력으로 널리 존경을 받았다.
인도 경제를 더욱 개방하려는 그의 노력은 그의 소속 정당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연정 상대들의 요구로 인해 종종 좌절당하기도 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건강상의 이유로 정치 활동을 축소했으며, 간헐적으로 공공 연설과 집필 활동을 했다.
싱과 그의 아내 구르샤란 카우르는 슬하에 딸 3명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