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우리가 잘못 관리하면 그렇게 될 수 있겠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낭독하던 중 즉흥적으로 내뱉은 말이다. 신년사 원고에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을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위기와 같은 상황으로 보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다. 이 총재의 애드립을 듣고 나서 해당 문장의 행간이 다시 읽혔다. “안심하면 안 된다. 자칫 잘못하면 과거의 위기를 다시 겪을 수 있다.”
이날 이 총재는 작심발언을 했다. 헌법재판관 2명을 임명한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결정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국무위원들을 향해서는 최 대행을 비판만 할 게 아니라 해외 신용평가사에 미칠 영향도 고려하라고 일침을 가했다. 비상계엄 사태에 대한 국무위원들의 책임론이 빗발치고 있다. 계엄과 관련한 말과 글이 신중해지는 시기에 이 총재는 작정하고 발언을 한 것이다. 그리고 경제를 잘못 관리하면 ‘그렇게(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 위기)’ 될 수 있다고 경고를 한 것이다.
같은 날 나이스신용평가에서는 국가신용등급 강등 가능성에 대한 경고성 메시지를 담은 리포트를 냈다. 올해 국고채 발행 증가, 추가경정예산 편성 가능성 등을 고려했을 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 상승은 국가신용등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진단한 것이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가 계엄사태 이후 리포트에서 한국의 신용등급(AA-)을 유지하면서도 “재정 적자로 인한 정부 부채의 지속적 증가 추세는 중기적으로 신용등급에 하방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지적한 점과 맞닿아 있다.
원화 가치가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으로 낮아지고 주식 시장은 외면받고 있다. 노무라금융투자는 작년 12월에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해외 투자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의 후일담을 전했다. 매크로 전망 세미나에서 내년(2025년) 1분기까지 가장 좋은 성과를 낼 아시아 시장을 묻자 일본이 약 40%로 가장 많았다. 이어 대만, 중국, 인도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을 택한 투자가는 아무도 없었다. 해당 세미나는 6개월에 한 번씩 진행하는 것으로 하반기 세미나는 비상계엄 사태가 발생한 이후에 열렸다. 상반기에 열렸던 세미나에서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도 한국 증시는 하위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정치적 불확실성이 더해지면서 투자가들의 선택지에서 완전히 빠진 셈이다.
“대통령에 대한 체포 실패는 더 많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할 가능성이 상당하다(WSJ)”, “정국 상황에 따라 코스피 지수가 등락하고 있어 외인 투자자 유입 기대는 난망(블룸버그)” 등 국내 상황에 대한 해외시각(국제금융센터 리포트)은 냉담하다.
경제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국민의 안전을 뒷전으로 미룬 대통령을 향한 법감정이 극에 달하는 순간에도 경제 시계는 돌아가고 있다. 한국 경제에 대한 평가도 시시각각으로 이뤄지고 있다. 정치·사회적 혼란이 가중될수록 경제는 더욱 현실을 직시하고 냉정해져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변론기일을 이달 14일(1차), 16일(2차)로 지정했다. 공교롭게도 2차 변론기일 당일은 통화정책방향을 결정하는 올해 첫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리는 날이다.
정치·경제를 떼어놓는다는 말에 어폐가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에서도 경제는 안정화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총재의 말처럼 ‘그렇게’ 되게끔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