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간 재판 끌려다니며 리더십 공백
AI반도체 흐름 못타고 1등 밀려나
검, 상고 철회해 경영족쇄 풀어야
![▲이초희 부국장 겸 산업부장](https://img.etoday.co.kr/pto_db/2024/06/600/20240610172608_2035687_860_1280.jpg)
유시민 작가의 저서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책은 ‘거꾸로 읽는 세계사’다. 1988년 초판에 이어 2021년 개정판을 낼 만큼 작가 스스로도 애착을 가지는 책이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첫 머리에는 ‘드레퓌스 사건’이 상세히 다뤄져 있다. 이 사건은 1894년부터 1906년까지 프랑스를 뒤흔든 정치적 스캔들이다. 유대인 장교 알프레드 드레퓌스는 독일에 기밀을 누설한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기소됐다. 재판 과정에서 어떤 증거도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진범이 밝혀졌지만 프랑스 군부는 ‘유대인이라는게 증거다’라는 수준의 주장을 이어갔다. 결국 드레퓌스는 유죄가 확정됐다.
수차례 재심 끝에 1906년,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프랑스군은 9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했다. 이는 반유대주의와 권력 남용의 상징적 사례이자 진실과 정의를 위한 투쟁의 중요성을 일깨운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검찰이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사건에 결국 상고했다. 1ㆍ2심 모두 19대 0으로 완패하면서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음이 입증됐다.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실 일각에서는 상고를 예견하기도 했다. 검찰수사심의위원회가 일찌감치 ‘수사 중단 불기소 권고’를 내렸지만 이를 무시하고 기소를 감행한 검찰의 전력(?) 때문이다. 삼성에서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배경일 터다.
미국은 형사 사건 1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검찰이 항소할 수 없다. 항소는 피고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제도이지 패소한 검찰에게 기회를 주는 제도가 아니라는 취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1심은 물론 2심까지 패소해도 상고할 수 있게 한 것은 검찰의 기소권 남용이다.
검찰은 끝까지 가겠다는 심보다. 법리 판단에 대한 견해 차이를 근거로 삼지만, 이는 결국 자신들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의 표현일 뿐이다. 드레퓌스 사건 당시 프랑스 군부가 보였던 교만과 다를 바 없다.
이제는 검찰의 무리한 수사와 기소, 항소·상고 남발에 책임을 묻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과하게 수사하고 기계적으로 기소하는 관행에 제동을 걸 때가 됐다.
더욱 큰 문제는 시기다. 지금은 글로벌 경제의 대전환기다. 인공지능(AI) 반도체를 둘러싼 미중 간 패권 경쟁이 치열하고, 각국은 기술 주도권을 놓고 사활을 건 전쟁 중이다. 삼성전자가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반도체 대응에서 뒤처진 것도 9년간 이어진 사법 리스크가 큰 원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 기업들이 리더십 공백없이 전쟁터에서 싸워야 할 때, 검찰은 실익도 없는 상고로 최고경영자(CEO)의 발목을 잡으려 한다. 기업과 국가경쟁력을 모두 해치는 자해 행위나 다름없다.
드레퓌스 사건의 전환점은 작가 에밀 졸라였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작가였던 그는 군부와 정부의 부도덕성을 신문에 폭로하며 양심의 목소리를 냈다. 이재용 회장 당시 수사팀장이었던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무죄 판정 이후 “공소 제기를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국민께 사과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였음을 양심고백한 셈이나 다름없다.
검찰에게 아직 선택의 기회는 있다. 90년이 지난 뒤에야 사과했던 프랑스군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무리한 상고를 철회하고 진정한 법치의 수호자로 거듭날 것인가.
역사는 언제나 늦게라도 진실의 편에 선다. 검찰이 꼭 기억해야 할 교훈이다. 한 번 걸리면 기어코 없는 죄도 만드는 조직이라는 불명예를 자초하지 말아야 한다. 반성은커녕 끝까지 기업 경영에 족쇄를 채우려는 지금의 행태는 멈추는 게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