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룡 우리금융그룹 회장 내정자.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노동조합이다. 임 내정자는 “직원들과 노조의 상처와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면서 “임기 동안 그 누구보다도 우리금융 직원들을 사랑할 것이고, 그 누구보다도 직원들을 사랑했던 회장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관치 금융’이라는 안팎의 곱지 않은 시선을 누그러뜨리려는 행보로 해석된다. 지난해
“죽겠다. 다른 데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도 힘들다.” 국내 굴지의 제과업체 관계자는 최근 업황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제품 가격이 싸고 중요도가 낮은 제품 특성상 과자는 온라인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유통채널의 중심은 전자상거래 등 온라인으로 급격히 옮겨가고 있고 출산율도 떨어져 주소비층인 아이들마저 줄고 있으니...”라며 말끝을 흐
"인재가 두산의 미래를 만드는 힘, 두산의 간판은 두산인들입니다."
“나야 두산에 잠시 머물다 갈 사람이지만 두산인은 영원합니다.”
“기업은 바로 사람이고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은 곧 사람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고(故) 박용곤 명예회장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중요시했다.
1981년 그룹 회장직에 오른 이후 '모든 사
새누리당은 22일 비례대표 후보 45인을 발표했다. 그중 비례 6번을 받은 김규환(59) 국가품질명장은 누구일까.
김 명장은 학교를 다녀본 적이 없다. 5대 독자 외아들인 그는 일가 친척 하나 없이 15살에 소년가장이 돼 기술 하나 없이 대우종합기계 사환으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회사 마당을 쓸고 물을 나르면서 일을 배워갔다. 부지런하게 회사생활을 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진행하고 있는 두산그룹의 대수술이 5부 능선을 넘어가고 있다. 과거 소비재를 털어내고 중공업 그룹으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주도했던 박 회장이 주력으로 꼽히는 공작기계사업을 매각하고, 면세점 사업권을 확보함으로써 그룹의 사업 포토폴리오를 다시 구성하고 있다.
무엇보다 지난 2007년 당시 쾌커를 불렀던 미국 건설장비 회사 밥캣(Bob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가 베트남 하노이에서 김우중 전 회장을 20여차례 만난 뒤 집필한 ‘김우중과의 대화-아직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가 출간되면서 김대중 전 정부의 산업 구조조정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가장 쟁점이 되는 것은 국제금융자본의 논리를 지나치게 쫓았다는 주장이다. 금융자본의 논리대로 산업자본을 구조조정하다 보니 주요 기
두산그룹이 마지막 남은 먹거리 브랜드인 KFC를 매각하면서 식품 분야 사업을 모두 정리했다. 종합 중공업 그룹으로 거듭나겠다고 선포한 지 20여년 만이다.
두산은 자회사인 DIP홀딩스가 유럽계 최대 사모펀드인 ‘CVC 캐피탈 파트너스’와 SRS코리아의 지분 100%를 매각하는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했다고 8일 밝혔다.
SRS코리아는 2004년
“두산에는 ‘숙원사업’이란 것이 없다. 잘나가던 OB맥주를 판다고 했을 때 ‘두산의 얼굴인데, 두산의 역사인데…’라며 많은 분이 걱정했지만, 수익성이라는 유일한 척도로 과감하게 팔았다.” (2011년 4월 한양대 글로벌 CEO 포럼 강연)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이 당시 핵심이던 주류 사업을 접은 일화는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그의 선택으로 두산그룹은
차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사실상 결정된 박용만(59·사진) 두산그룹 회장은 금융맨으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학업을 마친 뒤 1977년 외환은행에 입사해 약 2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은행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1982년부터 두산과 인연을 맺었다.
1990년대 들어 박 회장의 경영능력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IMF 경제위기 직전인 199
두산그룹은 1946년 설립된 무역업체 두산상회가 모기업이지만, 그 출발은 1896년 문을 연 박승직상점이다. 1936년 창업주 박승직 회장(1950년 타계)이 장남 박두병 초대 회장(1973년 타계)에게 경영을 넘기고 물러나면서 그룹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2012 회계연도 기준 총자산 규모는 29조4250억원대로 대기업 집단(공기업 제외) 순위 13위다
“20대 학생이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공부다”
김동철 두산엔진 사장은 지난 26일 경남 창원시에 소재한 창원대에서 진행된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생을 위한 최고경영자 초청 특강’에 참석,이같이 강조했다.
김 사장은 이 자리에서 “20대 젊은이들은 무엇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특히 “20대들에게는 지금 자신이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57·사진)은 ‘강력한 두산그룹 만의 기업문화 조성’을 강조했다.
100년 기업 두산그룹의 새 수장이 된 박 회장은 2일 오전 서울 길동에 있는 DLI연강원에서 열린 그룹 회장 취임식에서 “두산그룹이 폭발적인 성장을 이어가려면 사고와 가치의 준거가 되는 강력한 기업문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평소에 인재를 중시해 온 박 회장은 이
두산그룹에 ‘박용만 시대’가 열리고 있다. 고 박두병 회장의 5남인 박 회장은 30일 이사회에서 의장에 선임됐다. 지주회사 전환으로 경영체제가 안정화 가도에 진입했으며, 두산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본격 성장시키는 데 최적임자이란게 공식 입장이다.
지난 1982년 두산건설에 입사한 박 회장은 두산음료, 동양맥주, (주)두산 전략기획본부, 두산인프라코어 등
두산은 30일 이사회를 열고 이사회 의장에 박용만 회장(57세)을 선임했다. 그동안 ㈜두산 대표이사 CEO로서 실무를 이끌었던 박용만 회장은 이사회 의장을 겸하게 됨으로써 박용현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경영 총괄 및 대표를 맡게 됐다.
㈜두산 이사회의 이날 결정은 박용현 전 두산그룹 회장의 용퇴에 따른 결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용현 회장은 “2009년
(주)두산 이사회 의장에 선임됨으로써 그룹경영을 총괄하게 된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은 재벌가 로열패밀리 가운데 일반인과 가장 친숙한 사람으로 꼽힌다. 얼리어답터로 알려진 그는 자택과 집무실을 언론에 공개하는가 하면 13만여 팔로워를 보유한 트위터 마니아답게 일상생활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경박하지 않느냐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건 사적 영역일 뿐이다. 그룹경
올해 115살을 맞은 장수기업 두산그룹. 글로벌 기업 삼성보다 더 오랜 시간 한국의 근현대사와 기업의 흥망성쇠를 목전에서 지켜보며 살아남은 두산은 현재 재계 순위 12위로 계열사 25개, 자산 26조원에 이르는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두산은 전통과 근대화가 접합하는 중심 거리인 서울 종로에서 태동했다.
◆박승직의 두산 대장정
1896년 8월 1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부실채권 정리, 기업구조조정, 국유재산관리, 서민금융지원 등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쌓은 노하우와 성공사례를 담은 'KAMCO 성공스토리'를 발간했다고 30일 밝혔다.
이번 사례집은 기업구조조정, 부실채권 인수·정리, 신용회복·서민금융 지원, 자산관리시스템 선진화 등 4개 분야 14건의 모범사례로 구성되어 있다.
장영철 캠
범 지경부 차관 출신(중소기업청·특허청 포함) 인물들 역시 퇴직 후 기업과 산하 공기업·대학 등에 자리를 잡았다.
기업에 포진한 대표적 인물은 김종갑 전 차관이다.
김 전 차관은 상공장원부 통상정책과 과장, 통산산업부 무역위원회 조사총괄과 과장, 통상협력국장, 산업자원부 차관보 등 주로 대미 통상업무를 맡았다. 2006년부터 2007년 2월까지 산업
지금까지 대형 인수·합병 시장에는‘돈을 가장 많이 써낸 곳이 가져간다’는 암묵적인 원칙이 작용해 왔다. 두산의 두산인프라코어(옛 대우종합기계) 인수, 금호의 대우건설 인수, 포스코의 대우인터내셔널 인수가 모두 그랬다.
하지만 금호그룹에‘승자의 저주’가 현실화하면서 이런 인식에 변화가 왔다. 무리하게 인수가격 경쟁을 벌여 나중에 감당하지 못하면 인수기
대법원이 회계를 조작해 감사보고서를 허위 공시한 김우중씨 등 대우그룹 전 경영진에게 개인투자자의 주가손실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 2부(주심 전수안 대법관)는 19일 개인투자자 박모씨(65) 등 7명이 김우중씨 등 전 임원 3명과 대우중공업·대우조선해양·대우종합기계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