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동물이 있다. 하루에 411마리 꼴로 총에 맞아 사살되고, 하루에 164마리 꼴로 차에 치여 죽는다. 바로 우리에게 익숙한 고라니의 현주소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희생되는 고라니는 연간 20만 마리가 넘는다.
고라니는 몸 전체 길이가 90센티미터, 몸높이가 50센터미터, 몸무게가 15킬로그램 정도로 사슴과에서도 작은 축에 속한다. 사슴류의 상징인 뿔이 없고 대신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수컷은 송곳니가 발달해 밖으로 돌출해 있는 반면 암컷의 송곳니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다. 두드러진 송곳니 덕에 외국에선 흡혈귀 사슴(Vampire dee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온전한 초식동물이다.
지구적인 관점에서 고라니는 한반도와 중국 일부 지역에서만 자연적으로 서식하여 분포범위가 넓지 않다. 중국 고라니 개체군 크기는 1만여 마리에 불과해 보호종으로 지정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포유동물 중 하나다. 황해도 이북에는 서식밀도가 낮아 한반도 중에서도 중남부 지역이 고라니의 본진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포유동물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고라니를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아니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다. 고라니에 의한 농작물 피해에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간다. 2022년 기준 통계에 따르면 농작물 피해액은 약 11억7천만 원이다. 하지만 통계와 현실의 간극은 커 보인다. 고라니가 여기저기 조금씩 입질을 하며 농작물의 상품성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아 통계에 잡히지 않는 소규모 피해가 누적된다. 최소피해산정액 10만 원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적절한 보상 요구도 어렵다. 때문에 고라니는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돼 매년 15~20만 마리가 포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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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라니 개체 수가 급증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80년대 이후다.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상위 포식자와 대륙사슴, 사향노루 등 경쟁종이 사라지면서 고라니가 번성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그렇다면 고라니 천적과 경쟁자는 누가 없앴을까? 결국 대부분의 환경문제가 그렇듯, 고라니 문제 역시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염려스러운 것은 유해동물 딱지가 붙은 고라니를 백해무익하고 없애야 할 존재로 여기는 생명경시의 여론 형성이다. 개체 수 조절을 위한 포획과 사살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마땅히 죽여도 되는 동물로 바라보는 시선은 거둬야 한다.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먹는 것, 입는 것 어느 하나 자연에서 오지 않은 건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좋은 동물이나 나쁜 동물이란 없다. 모든 생물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가지며, 유익하거나 해롭다고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고라니를 포함한 야생동물이 해당 공간에 존재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가능한 경우 비살상적 통제 기술을 활용하며, 단순히 제거하는 것보다 갈등을 완화하는 데 중점을 둔 통합적 야생동물 관리 정책이 필요하다. 현실성 있는 피해 보상 체계 마련, 적절한 피해 방지 시설 설치, 과학적 연구를 통한 개체군 구조 이해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사실 고라니는 호모사피엔스보다 먼저 약 160만 년 전 한반도에 도래했다. 이 땅의 선주민인 셈이다. 고라니 입장에선 인간이야말로 침입종일 수 있다. 좋든 싫든 우리는 한반도라는 이 소중한 땅에서 함께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다. 이제는 단순히 대립하는 관계를 넘어 공존을 모색해야 할 때다.
유해야생동물 문제는 인간의 이익, 생태적 지속 가능성, 윤리적 책임을 균형 있게 조정해야 하는 철학적 난제다. 정답을 위한 길은 멀고 험할 것이다. 그럼에도 고라니라는 화두를 시작으로 우리 사회가 공존에 대해 조금씩 고민하고 한 걸음씩 내딛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