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문제의 원인을 나로부터 찾으려는 착한 척(?)이 도움이 되기도 한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메아리도 산이 있어야 되돌아오는 법인데 내게 전혀 문제가 없다면 그것은 내가 없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가끔은 존재 그 자체가 이유인 경우도 있지 않던가! 이처럼 누군가와의 불협화음이 있을 때 어찌해야 다시 평온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는 상대의 같잖은 행동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이자까지 쳐 되돌려주는 악수(惡手)를 택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지 않는가! 화를 내면 그 이후 더 심한 화가 찾아온다는 것을. 그래서 택한 나의 옹졸하면서도 일부 합리적인 태도가 일종의 무시(無視)다.
무시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존재 의의나 가치를 알아주지 아니하거나 깔보거나 업신여김’이다. 어떤 사안에 대해 화는 나는데 뭐라 응대할라치면 그와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일단 ‘상황’부터 무시하려 애쓴다. 이 화나는 상황을 화나지 않는 상황이라 칭하지 않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무덤덤하게 대한다. 이렇게 상황을 무시하고 상대를 직시하다 보면 상대와 교감의 창구를 찾기도 하는데, 그런 경우 나의 현명한 선택에 대한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상황의 무시로 통하지 않을 때면 곧이어 사람에 대한 무시가 어쩔 수 없이 시작된다.
무시라는 것은 실로 위력적이다. “욕을 먹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것이 무시”라는 말도 있듯이, 너도 느껴보고, 나도 느껴봤듯 그 모욕감은 대단하다. 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상대의 무시하는 태도에 어떻게 맞서 화를 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화를 내자니 무시당하는 것 같고, 안 내자니 무시한 사람의 이유 모를 입꼬리 올라감이 영 눈꼴사나워 못 봐주겠다.
대부분 무시의 태도를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묘사하는데, 사실 모든 게 그렇듯 무시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사뭇 다를 수 있다. 일명 공격적 무시는 기본적으로 나쁘지만, 방어적 무시는 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전자는 일부러 상대방의 신경을 긁어 도발하고 화가 나게 하고 괴로움을 주려는 공격성과 악의가 포함된 반면 후자는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자기방어형 태도이기 때문이다.
자기방어형 무시의 긍정적인 점은 더 이상의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를 내다 보면 상대의 인성까지 들먹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상대의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파경을 맞는 원인이 된다. 반면, 무시는 분노와 화를 똑같이 야기할지언정 어떠한 ‘객관적인’ 증거도 남기지 않으므로 상황이 호전되어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 마음먹기에 따라 씻은듯이 사라지기도 하고, 잊히기도 한다.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화(anger)의 태도가 바로 무시의 쓸모가 된다. 그래서 자기방어형 무시는 상대와의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둘 때 한 번쯤 써봄직한 방법이다.
그럼에도 어떠한 무시도 정당화될 순 없다. 무시하면 무시가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면 사랑이 되돌아오고, 미워하면 미움이 되돌아오듯 무시도 인간 관계에 기인하여 되돌아오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도 언제든 무시받을 수 있고, 무시받을 자세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무시는 자기로부터 위안을 받는다. 그러므로 무시는 자기 내면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막다른 낭떠러지에서만 쓰길 권고한다. 무시는 이처럼 깊은 생각을 한 연후에야 내릴 수 있는 태도이지 단순 감정에 대한 즉흥적인 태도가 될 수 없다. 무시할 자신이 있을 때, 비로소 무시의 쓸모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