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HMGMA 통해 현지 생산 확대
K배터리, AMPC 축소 여부에 촉각
제47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공식 취임하면서 국내 자동차·배터리 기업에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공언한 것처럼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해 제조업을 되살리고, 전기차 의무화 정책을 종료하겠다고 예고했다. 국내 기업들은 ‘현지 생산 확대’와 ‘유연한 대응’으로 대응해나갈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취임사를 통해 “‘그린 뉴딜’(친환경 산업정책)을 종식하고, 전기차 의무화를 철회한다. 자동차 산업을 구하고, 위대한 미국 자동차 노동자들에 대한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전기차 보급 정책을 폐기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그간 트럼프 대통령이 강조한 대로 바이든 행정부에서 이뤄진 ‘전기차 의무화 정책’ 폐기를 공식화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는 전기차 보조금 정책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폐기로 즉각 이어지지는 않는다. IRA의 폐기를 위해서는 상·하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당시 바이든 행정부의 그린 뉴딜 정책에 따른 배출가스 규제 및 전기차 보조금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공약해왔다. IRA가 본격적으로 폐기되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이 장기화하면서 수요가 더욱 둔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한 보편관세 역시 변수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당시 중국산에 60%를, 나머지 국가에서 수입되는 상품에는 10~20%의 보편관세를 부과한다고 밝힌 바 있다. 다만 취임식에서 관세 부과를 통한 무역정책 전반의 개혁을 예고하면서도 구체적인 신규 관세 부과 조치는 언급하지 않았다.
관세 부과는 미국 시장에서 역대급 실적을 기록 중인 국내 완성차 업계에 새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현대차그룹은 미국에서 170만8293대를 판매해 역대 최대 판매량을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절반은 국내에서 생산해 수출하고 있다. 보편관세가 실현될 경우 현대차는 월 2000억~4000억 원, 기아는 월 1000억~2000억 원의 부담이 발생한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 1기 당시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한국산 자동차에 대해서는 무관세가 유지된 바 있다. 정부와 국내 기업들이 미국과의 협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향방이 갈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차 앨라배마주 몽고메리 공장, 기아는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 공장 등을 가동 중이다. 지난해 말부터 30만 대의 연간 생산능력을 갖춘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공장 가동도 시작했다.
당초 HMGMA는 전기차 전용 공장으로 지어졌으나, 전기차와 하이브리드를 모두 생산해 시장 수요에 탄력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생산능력도 연간 50만 대 수준까지 확대하면서 관세 리스크에 대응하기로 했다.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 ‘TMED-II’가 적용된 신차도 현지에서 다수 출시할 계획이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사장은 올해 그룹 신년회에서 “미국 시장이 우리 회사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만큼 우리의 미국 사바나 투자 프로젝트인 HMGMA를 최대한 활용할 준비가 돼 있다”며 “우리는 미국에서 약 19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있고, 이번 프로젝트만으로 미국에 약 6만5000개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현대차그룹은 유연한 대응을 펴면서 트럼프 행정부와의 접촉도 늘리고 있다. 현대차는 국내 주요 기업 중 유일하게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100만 달러(약 14억7000만 원)를 기부하기도 했다. 대미 투자를 늘릴 가능성도 점쳐진다. 그룹 계열사 현대제철은 미국에 대형 제철소를 신규로 짓는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경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으로 (국내 완성차 기업들의) 전기차 정책들이 조금 위축될 수는 있지만, 하이브리드차 등 우회하는 방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는 이어 “무역 흑자를 자동차가 많이 내고 있어 압력이 들어올 텐데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서 공장도 짓고 투자도 많이 하는 미국 내 제조업에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는 것들을 알리는 전략을 펴는 게 중요하다”고 제안했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에게는 IRA법 내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AMPC) 혜택 축소 여부가 최대 관심사다. AMPC는 미국에서 친환경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에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한다. 배터리 셀은 킬로와트시(㎾h)당 35달러, 모듈은 10달러를 각각 지급한다. 미국에 진출한 국내 배터리 기업들은 매 분기 수천억 원의 AMPC를 받아 실적을 보전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고려하면 미국 내 투자를 촉진하는 AMPC를 대대적으로 손질할 가능성은 낮다는 게 업계 시각이다.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많이 진출한 미시간·오하이오·조지아주 등은 공화당 우세 지역인데, 고용 창출과 지역 경제 발전 효과를 고려하면 지역 의원들이 IRA 혜택 축소를 반길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AMPC가 유지되더라도 구매 보조금 축소 자체가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가로막으면 결국 배터리 업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미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장기화로 배터리 업계의 수익성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해 4분기 3년여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했고, 삼성SDI와 SK온도 적자가 예상되는 상황이다.
구자민 커빙턴앤벌링 조세전문 변호사는 17일 '트럼프 2.0 배터리 정책 대응 세미나'에서 "AMPC 혜택은 유지될 것이란 의견이 우세한 상황이지만 조항 변경으로 전기차 수요가 줄면 전기차와 배터리 기업이 타격을 입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AMPC에 해외우려기업(FEOC) 조항을 추가해 세액공제 요건을 강화해 보조금 규모를 줄이는 방법도 있다. 표면적으로는 중국 업체들의 미국 진출 장벽을 높이지만, 중국산 핵심광물 의존도가 높은 우리 기업에도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배터리 업계는 시장 환경 변화를 예의 주시하면서 유휴 생산라인 전환 등 효율적인 생산시설 운영을 통해 리스크를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이다. 업계 관계자는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라면서도 "단기적으로 수익성 방어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캐즘 이후에 대한 투자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