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눈] 복원해야 할 ‘연대와 협력’

입력 2025-02-1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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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 전문위원·언론학 박사

대학에 다니던 시절, 유난히 재밌게 들었던 강의가 있다. 민주주의의 여러 유형에 대한 강의였다. 우리가 두루뭉술하게 알고 있는 ‘민주주의’라는 정치 체제는 운영 방식과 관습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나뉜다. 북한과 같이 독재 군주가 모든 정치적 의사 결정을 독점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또한 민주주의의 한 유형에 속한다.

하지만, 흔히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에는 의회 구성 방법이나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따라 세 가지 유형이 있다. ‘사회적 합의주의(social consensus)’, ‘다원주의(pluralism)’, 그리고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가 그것이다. 세 가지 유형 각각 구체적인 체제 면에서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양한 정치적 입장과 의견을 포용하면서도 정치적 갈등을 조율하고 안정적인 정치 운영을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충돌하면서 이긴 쪽이 정치적 의사 결정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합의와 협력을 통해 정치를 이끌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유형을 지향하고 있을까? 당시 강의를 맡았던 교수님의 질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열띤 토론이 벌여졌다. 일부 학생들은 다양한 사회단체의 존재와 그들 간의 연대와 연정의 사례, 그리고 비례대표제를 예로 들며, 한국 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 유형에 해당한다고 했다. 반면, 어떤 학생들은 ‘숙의민주주의’ 유형을 뽑기도 했다. 한국인들이 정치적 토론에 적극적인 것과 정치적 불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시위 등을 통해 개인이 적극적인 저항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이 유형으로 본다고 말했다.

필자는 ‘다원주의’, 그중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집단들이 자신의 지분을 확대하기 위해 갈등과 연정을 거듭하는 ‘신다원주의(neo-pluralism)’라고 생각했다. 교수님을 비롯하여 일부 학생들도 이런 의견에 동의하는 듯했다. 교수님은 그와 더불어 이런 신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문제를 지적했다. 다수결에 의한 대의 민주주의 체제 아래, 신다원주의의 정치적 관습이 지속된다면, 정치적 갈등이 더 극심해질 수 있으며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자생적 힘도 줄어들 것이라며 말이다. 왜냐하면, 신다원주의식 결탁과 연대의 과정에서 소수의 입장이 다수에 흡수되며, 정치적 양극화가 증대되기 때문이다. 다양성이 줄어들수록 혼란과 위협을 잠재울 수 있는 회복탄력성이 줄어든다는 자연의 법칙은 정치에도 적용된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 오래전 신록의 계절에 들었던 강의를 2025년 2월의 어느 눈 내리는 날에 떠올린 이유는, 교수님의 이런 전망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두 번째 탄핵 정국은 아직도 수습이 요원해 보인다. 정치 진영의 양 축이 서로 칼을 겨누기만 하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기만 하는 모습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는 이들은 어느 한쪽이 나빴다는 식의 분석을 많이 내놓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이렇게 도탄으로 빠지게 된 데에는 역사와 관습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의 정치적 다양성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보수와 진보가 싸우는 사이에 중도적 입장이나 둘을 중재할 수 있는 정당이나 인물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런 과정에서, 국가의 중대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이 연대와 협력을 하는 경우는 더욱 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정치적 협력과 합의는 정치인 개인의 인성이나 도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 정치가 그 어느 때보다 위기인 지금, 지난날의 정치적 악습과 그것의 누적으로 인한 체계적 과오를 되짚어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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