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국회→자문·공론위에 넘어간 공…최종안 나오자 반대
윤석열 대통령은 2022년 취임 첫해 연금개혁에 대해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겠다"고 했다. 하지만 집권 3년 차를 맞은 현재까지 개혁에 진척은 없다. 정부가 선명한 청사진 없이 재정 안정·소득 보장으로 양분된 전문가 뒤에서 조연 역할을 하는 데 그쳤고, 국회도 이에 편승하며 '골든 타임'을 허비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관련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27일 정부가 발표한 제5차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안을 두고 '맹탕'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핵심 쟁점이었던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등 얼마를 더 내고, 더 받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모수개혁 내용 없이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취지의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당시는 2022년 하반기 21대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구성된 지 약 1년여 흐른 시점이었다. 연금특위는 출범 당시 산하에 연금 전문가로 구성된 민간자문위원회를 꾸렸다. 정부와 국회가 뒤로 물러나고 재정 안정론을 주장하는 김용하 순천향대 IT경제금융학과 교수와 소득 보장론자인 김연명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가 각각 여·야 몫 공동위원장으로서 자문위와 개혁 논의를 이끌었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5차 계획 발표 약 3주 후 민간자문위가 최종 도출한 안은 '보험료율 15%·소득대체율 40%'(더 내고 그대로 받기),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더 내고 더 받기) 등 두 가지 모수개혁안이었다. 전자는 김용하 교수, 후자는 김연명 교수의 안이다. 자문위에 참여한 한국개발연구원(KDI) 소속 위원(이강구·신승룡)들의 '신·구연금 분리' 등 구조개혁안은 포함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때는 22대 총선을 약 5개월 앞둔 터라 정치권의 모든 이목이 공천에 쏠려 있었고, 정무적으로도 연금개혁에 속도를 붙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민 반감이 큰 보험료율 인상이 불가피해 눈앞의 선거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연금특위는 1월 민간 전문가 중심의 공론화위를 꾸려 사실상 최종 논의를 위임했다. 시민대표단 숙의 과정에서 김연명 교수 안인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50%'가 과반 지지를 얻었다. 해당 안을 두고 재정 안정 측 전문가를 중심으로 현실과 동떨어진 '개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여야 논의 과정에서 소득대체율은 소폭 줄었지만, 결과적으로 개혁의 밑그림을 민간에 전부 떠넘긴 데 따른 혼란이었다.
연금특위는 해당 안을 토대로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3%'(국민의힘), 보험료율 13%·소득대체율 45%(민주당)으로 최종 협상에 들어갔고, 민주당이 협상 막판 '소득대체율 44%' 절충안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여당이 차기 국회에서 구조개혁과 함께 연금개혁을 재논의할 것을 주장하면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는 연금개혁에 완전 손을 놓은 채 국회에 공을 넘겼고, 국회는 공론화위에 넘겼다"며 "결국 국민이 숙의 과정을 거쳐 결정한 것도 정부가 구조개혁을 명분으로 거부해 연금개혁을 다음 국회로 미룬 건 최악이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수·구조개혁의 가치도 상반되는 게 아니다"며 "구조개혁을 위해 모수개혁을 할 수 없다는 논리는 비상식적"이라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경제학자는 "시민대표단이 찬성한 안이 옳다고 보지 않고 구조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정부가 방향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면서 "지금처럼 하면 임기 내 연금개혁은 절대 불가능하고 '개혁하겠다'는 말은 레토릭에 그칠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가 조연 역할에서 벗어나 연금개혁에 '그립'을 쥐지 않으면 임기 내 성사는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지속 가능하고 현실적인 연금개혁 구상을 지닌 전문가 자문을 바탕으로 정부가 마련한 구체적인 안을 국민에 설명하고 국회에 최종 합의를 맡겨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의 지적이다.
김원식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금처럼 국회가 전문가 모아 놓고 공청회만 하는 형태로는 결론을 낼 수 없다"며 "정부가 아주 구체적인 안을 만들어 국민에 설명하고, 국회가 그 안을 받아들이는 형태가 선진국의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지지율이 떨어질 수는 있지만 한편으로 정부가 난제인 연금개혁을 제대로 정리한다면 반대로 국민 신뢰를 얻을 수도 있다"며 "이건 정부의 역량에 관한 문제"라고 말했다.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도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3대(연금·노동·교육) 개혁'을 한다고 했는데 아직도 정부가 연금개혁안을 안 만든 건 무책임한 것"이라며 "연금개혁은 표를 잃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책임을 국회, 야당에 떠넘기려고 하면 야당은 문재인 정부 때처럼 당연히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정말 개혁 의지가 있다면 당정 협의를 거쳐 마련한 정부안을 국회에 던져서 여야가 협상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여소야대 국회에서 정부가 어떤 안을 내놓아도 민주당 협조 없인 관철시키기 어렵기에 여야정이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는 현실론도 있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지금은 정부안을 먼저 내는 게 큰 의미가 없다. 연금뿐 아니라 다른 개혁도 그렇다"며 "큰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야와 정부가 합의된 안을 내놓는 것이 가능성이 높지만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연금개혁은 정부가 전문가의 다양한 의견을 듣고 정치권과 합심해서 밀어붙여야 하는데 지금은 의지만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민주당은 어떻게든 정부를 흔들어 조기 대선을 치르려고 할 텐데 정부가 개혁안을 내놓으면 그게 민주당의 또 다른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