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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26일 오후 2시, 검은색 승용차들이 서울 광장동 아카디아연수원에 줄지어 들어왔다. 차에서 내린 말끔한 정장차림의 중년 남성들이 어디론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서로를 잘 아는지 반갑게 인사도 주고받는다. 한 곳에 모여 앉은 그들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단상의 한 남자를 주시한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왼쪽 옷깃에 똑같은 모양의 붉은색 배지를 달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SK’ 두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최태원 SK 회장과 주요 관계사 최고경영자(CEO), 사외이사 등 40여명은 이날 열린 ‘2차 CEO 세미나’에서 그룹의 미래를 맡길 ‘따로 또 같이 3.0’ 도입을 결정했다. 지난 2002년 ‘따로 또 같이 1.0’ 경영체제를 적용한지 10년 만이다.
최 회장은 “앞으로 자기 회사의 일을 지주회사에 물어보지도 가져오지도 말아야 한다”며 계열사의 완전한 독립경영을 강조했다.
SK는 내년 1월 ‘따로 또 같이 3.0’ 경영체제에 돌입한다. 이로써 ‘총수→지주회사’로 이어지는 현재의 수직적 지배구조에서 수평적인 의사결정구조로 전환하게 된다. 각 계열사 CEO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할 부문별 6개 위원회가 여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지주회사인 SK(주)는 경영실적 평가를 제외한 모든 권한을 이양하게 된다.
최 회장은 2차 세미나에서 “그룹 회장보다 의장이라고 불리는 게 더 좋다”며 지배구조 혁신을 위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어 “새로운 경영체제는 아무도 해보지 않은 시도여서 쉽지는 않겠지만, 더 큰 행복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며 “모범사례가 될 수 있도록 믿음과 자신감을 가지고 추진해 나가자”고 당부했다.
최 회장의 이러한 도전을 경제민주화와 결부시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시각도 있다. 하지만 자신(총수) 대신 전문경영인(CEO)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책임과 역량을 강화하는 진일보한 경영 모델이라는데 이견은 없다.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SK그룹 성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대체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최 회장은 신 경영체제의 완성도를 높이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한 경영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 대기업으로는 처음 시도되는 만큼 ‘따로 또 같이 3.0’이 성공적으로 안착할 경우 지배구조의 새 지평을 열게 될 것은 분명하다. 재계 ‘신 경영사’의 첫 페이지는 이미 시작됐다.